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4.11.29. 한양도성, 남산(목멱산)구간에서 ~광희문까지

kyeong~ 2014. 12. 6. 16:31

 

 

 

남산(목멱산)구간

구간 : 백범광장 ~ 장충체육관
거리 : 4.2km
소요시간 : 약 3시간


남산백범광자에서 장충체육관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한강 남북을 포괄하는 현재 남산은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부에 해당하며 정상 부근에는

서울의 지리적 중심임을 표시하는 ‘서울 중심점’이 설치되어 있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으나

1970년대 이후의 성곽 보존 · 정비 사업과 1990년대 중반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남산-24시간 개방 (신라호텔~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안쪽 구간 09:00~18:00)


 장충체육관 뒷길은 주택 지역이므로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백범광장-안중근의사기념관-잠두봉 포토아일랜드-목멱산봉수대-남산팔각정-N서울타워-남산공원 정류장

-나무계단길-국립극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 장충체육관

 

 

한양도성길 안내:http://seoulcitywall.seoul.go.kr/front/kor/sub01/course.do

 

 

 

 

백범광장

남산 어린이 회관이 있고

남산 도서관이 있고...

젊은 날에 걸어서 와보던 곳을

그후 차량을 이용해 왔었다

또다시 걸어올라오는데 30년이 걸렸다.

 

 

남산 어린이 회관은

어린이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육영재단에서 건립한 복지회관이다.

1970년 7월 서울 남산에 처음으로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으며

1974년 10월 남산어린이회관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이양하고 서울 광진구 능동으로 옮겨갔다.

또 1988년부터는 이건물에 서울시교육정보연구정보원이 들어서있다.

이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어른들에게도 큰 인기를 모았던 곳이다.

특히 17∼18층에 마련된 새서울전망대는 한 시간에 한 바퀴 도는 회전 전망대로,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많은 사람이 몰렸다.


 

 안중근의사의 어록비

 

 

옛어린이회관 맞은 편에는 안중근 기념관이 있고

안중근 기념관 앞에는

안중근의 어록을 새겨 넣은 비석들이 비림을 이루고 있다.

 

독립을 위하여

남겼던 피같은 언어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말라고...

큰 바위에 읽기 좋게 큰 글씨로 새겨 두었다.

 

 

안중근 동상

시간상 안중근회관 관람은 생략하였다.

 

ⓒ자료

 

다시 또 도성을 따라 계단을 10분정도 올라 갔다.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단은 늘 힘다는 생각이 드는지...

계단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즈음

서울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조선왕조가 끝나고 1세기를 거슬러오는 동안

어마어마하게 달라졌음을 한양도성에서 생각에 잠겼다.

 

유난히 이끼가 잘 자라고 있는 성벽을 찍어 봤다

 

남산의 명물이다.

세상의 모든 언약은 남산에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저기 남겨진 언약들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래 본다.

 

 

 

열쇠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통화를 하던 전화케이스에

서로의 약속을 새기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 순간 그들의 행복은 최대치의 값을 내고 있었으리라.

 

 

 

남산타워와 봉수대

 

N서울타워(영어: N Seoul Tower)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2가 남산 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관광 및 전파 송출용 타워이다.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 미터, 해발 479.7 미터이다.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에 있어서 남산타워라고도 부른다.

안전행정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다.

1980년 개방 이후 현재까지 서울에서 해발 높이로 가장 높은 위치에서 높은 전망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오는 2016년 잠실에 롯데월드타워가 개관할 때까지 지위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세워진 곳은 원래 조선신궁이 있었던 자리로,

철거하면서 공터로 있다가 안전기획부 청사 등이 세워지면서 같이 세워진 것이다.

 

목멱산 봉수대 터

<기념물 제13호>

목멱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서울성곽길 남산코스에서 만나게 되는 남산 봉수대다.

남산봉수대 봉화의식 시간: 10:00-12:30 (월요일 휴무)

 

 

국사당(國師堂)

조선 태조 한양 도읍 정한 서울 수호 신사()로서 지은 사당.

북악산 남산 꼭대기 두었다.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원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하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잠시...나그네 발을 멈추고....

우리의 몸짓을 보았다.

힘과 눈빛과 집중력이 보이는 공연

오랫만에 여유로이 관람하였다.

우리것을 관람하는 관중이 많아서 좋았다.

 

 

남산타워...

프랑스에는 에펠탑

일본에는 WTC코스모스타워....

등등

나라마다 도심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우리나라 남산 전망대에도 외국인이 바글바글한 편이다.

 

남산은 추억과

남산의 새로운 볼거리를 가슴에 묻고

버스정류장쪽으로 걸어 오늘길

다시 뒤돌아보며 한 컷~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더 내려와 왼쪽으로 내려가면

남산의 숲길이 나타난다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걸어도 좋고

오늘처럼 낙엽이 떨어진 길...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도성을 걸어가는 맛....

젊은이들은 알까~

 

 

 

 

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특히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 태조 때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가을이 떠난자리에

성곽은 더 선명히 남는다

어쩌면 저 성곽이 남산의 나무들의 울타리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윙윙거리는 날

도성옆으로 바람을 피하며 걸어가는 맛도 괜찮지 않을까.

 

나무와 도성과 나무계단...

오랫동안 걸어서 피곤한 발걸음~

나무계단이라 걷기에 좋다.

 

 

 

남소문터

남소문(南小門)은 1457년(세조 3년) 도성 안에서 광희문을 통해 한강으로 가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새로 만든 문이다.

그러나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 원년)에 폐쇄하였다.

 이후 문을 다시 개통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호텔 뒷문 오른쪽 오르막길 가에 남소문 터 표석이 있다.

 

 

남산을 내려오면 만난 국립극장

이생강님의 대금연주를 저 극장에서 본 이후

실로 오랫만에 외관구경이나마 하고 지나간다.

 

1974년 광복절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여사가 저격당했었다는 기억도.....함께.

 

국립극장 [國立劇場

1950년 민족무대예술의 발전을 위해 나라에서 설립한 극장.

 

1950년 4월 29일 서울시 옛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서 개관되었다.

1949년 10월 18일 대통령령 제195호로 국립극장 직제가 공포되었고,

같은 달 29일 초대 중앙국립극장장에 유치진이 결정되었다.

개관기념으로 유치진의 희곡 〈원술랑〉(5막 7장)을 신협이 공연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립극장도 남하하여 1953년 2월 대구에서 재개관되었다.

1957년 6월에는 서울 명동의 시공관으로 옮기면서 전속극단을 정비했으며,

1962년 국립극장이 공보부로 이관되면서 재출발했다.

그뒤 같은 해에 개관된 드라마센터와 함께 대표적 연극극장으로 자리잡았다.

현재의 국립극장은 1973년 10월에 개관된 것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으며,

대극장(객석 1,494석 규모)과 소극장(객석 344석 규모) 및 기타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국립극장 전속단체에는 국립극단·국립창극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 등이 있어 각 분야별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극장앞

반얀트리클럽 정문을 통과해서  호텔동 주차장까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골프클럽 외벽을 따라 성곽길을 걸어갈 수 있다.

 

 

골프클럽 외벽을 따라 난 데크길

낙엽이 참 이쁜 구간이다.

 

 

이데크아래 성곽이 의미가 큰데 자료를 찾아 정리를 해보면 

장충단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문과 남산 제이 그랜 하우스 담장, 축대 등은 한양도성의 성돌을 옮겨 쌓은 것이다.

남산 제이 그랜 하우스 담장에는 ‘경주시(慶州始)’가 새겨진 성돌이,

자유센터 출입구 축대에는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이 새겨진 성돌이,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뒤편 축대에는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이라 새겨진 성돌이 있다.  

 

 

데크가 끝나면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전망대

약수동과 장충동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팔각정에서 장충체육관까지 이어진 도성길

멀리 주황색 높은 건물은 신라호텔이다

 

 

수북히 쌓인 낙엽들

도성이 막고 있어서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길가는 행인들에게 가을의 소리를 남기고 있다.

 

이길은 도성안쪽길

다음에 도성 바깥쪽 길을 걷는다면

도성에 한다가 새겨져 있다는데...

생과 곤을 찾아보고 싶다.

 

 

 

장충체육관 뒷길
평지부의 석성은 대부분 세종 때 새로 쌓은 것인데,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으며.

상대적으로 큰 돌을 아랫부분에 놓아 균형을 유지했다.

이 형태의 성벽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잘 볼 수 있다.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생(生)’ 자 (천자문 42번째)와

 ‘곤(崑)’ 자 (천자문 47번째)가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찾을 수 있다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  

 

 

 

 

 

 

 

 

 

신라호텔과 도성 사잇길...

은행잎과 단풍잎이 곱게 깔려 있다

 

여기를 내려가면 장충 체육관

남산 백범광장에서 시작하여 장충체육관까지 4.2km구간이 끝난다.

장충동 성곽벽천

동대입구역 태극당앞에는

2011년에 만든 성곽벽천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에 성곽모형을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하고

 주변에는 야생화가 자라게 조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산구간은 마무리를 하고

흥인지문을 향하여 간다.'

'

''

'

 '

'

이어서 한양도성 동대문 구간중 광희문까지의

구간을 정리해본다.

 

흥인지문구간

구간 : 흥인지문 ~ 장충체육관
거리 : 1.8km
소요시간 : 약 1시간


장충체육관에서 에서 광희문을 지나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흥인지문 일대는 도성 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성 안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수문(오간수문·이간수문)으로 빠져 나갔고, 하도감· 염초청·훈련원 등의 군사시설도 밀집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전차개설로, 일제강점기에는 도로 건설과 경성운동장 건설 등으로,

해방 후에는 도로 확장과 주택 건설 등으로 인해 흥인지문에서 장충동에 이르는 성벽 대부분이 철거·훼손되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 위치에 정비되어 있고, 하도감 유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안으로 이전되어 전시 중이다.

주변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동대문시장·평화시장·방산시장 등에서는 쇼핑도 즐길 수 있다.


 24시간 개방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가는 길은 민가 지역이니 조용히 걷는 배려가 필요하다.


 

장충체육관-천주교 신당동교회-백구컴퓨터크리닝-광희문-동대문역사관-동대문역사문공원(옛 동대문운동장터)-이간수문-오간수문터-흥인지문

 

 

 

 

 

장충체육관쪽으로 내려가면 큰 대로를 만난다.

 

성벽이 끝나면  대로를 질러 횡단보도를 건너고 편의점옆 좁은 길로 쭈욱 직진을 하면

신당동 성당이 나온다...

 

성당에서 계속 걷노라면

"백구컴퓨터크리닝" 이 나오고

맞은 편 친구네 마트옆 골목길로 쭉 걷노라면

이렇게 이쁜 담장이 나타난다

 

저녁무렵 마을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니

모두 집으로 찾아들었는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늦가을 혹은 겨울초입인데...

봄처럼 토끼풀이 성곽언덕에 가득하다.

봄인듯...의심스러울정도로....

아...이제 다왔다 길고 긴 길...

광희문이 보인다.

아침10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5시가 넘어 도착했다.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

'

'

'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2014.11.7.낙산구간 하산길에 찍은 사진)

 

 

 

광희문에 도착했을때 5:40분

광희문에서 흥인지문구간까지 대략 1km 남았지만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광희문에서 동대문까지는 도성이 자취를 감춘구간이기도 하다.

 

1930년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일대에 문화주택 단지를 조성하면서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을 훼손했으며,

해방 후 1960~70년대에 신축된 주택들도 성벽을 파괴하였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오간수 문터와 이간수문등등...답사를 하고 싶지만

날이 저물어..하나하나 면밀하게 볼 수 없을 것 같아 다음에 마져 조사하기로 하고

한양 도성구간 답사를 마무리 짓기로 한다.

.

.

.

흔히 발길에 차였던 돌하나에도 역사의 숨결이  있고

성벽 위에 자라는 손톱만한 이끼라도 수백년을 살아온 생명일 수도 있다

세상에 귀하지 아니한 것은 없고

숨결없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무관심이 관심으로 가는 새로운 기회를 갖는 중요한 길이 되었다.

역사에 대해서

조상의 숨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말 없는 돌이 역사를 지켰고

그 역사는 나를 스쳐가고 있는 것이다.

2014.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