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松廣寺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절.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寺)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체징(體澄)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改名)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懶翁)·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覺雲)·무학(無學)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義湘)의 법계도(法界圖)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국사전(國師殿:국보 제56호)·하사당(下舍堂:보물 제263호)·약사전(藥師殿:보물 제302호)· 영산전(靈山殿:보물 제303호)·청량각(淸凉閣)·척주각(滌珠閣)·우화각(羽化閣)· 천왕문·해탈문·대장전(大藏殿) 등 50여 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송광사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혜심고신제서(惠諶告身制書:국보 제43호)· 고려고문서(高麗古文書:보물 제572호)·경패(經牌:보물 제175호)·금동 요령(金銅搖鈴:보물 제176호) 등이 있으며 1093년 간행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 1095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제206호)과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영산전목불좌상 등이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 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르키는 글자로 18명의큰 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 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 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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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松廣寺)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이곳에서 배출된 16국사는
(1) 보조(普照)국사 지눌(知訥, 1158~1210
(2) 진각(眞覺)국사 혜심(慧諶, 1178~1234)
(3) 청진(淸眞)국사 몽여(夢如, ?∼1252)
(4) 진명(眞明)국사 혼원(混元, 1191∼1271)
(5) 원오(圓悟)국사 천영(天英, 1215∼1286)
(6) 원감(園鑑)국사 충지(沖止, 1226∼1292)
(7) 자정(恣靜)국사 일인(一印)
(8) 자각(恣覺)국사 정열(晶悅)
(9) 자오(慈悟)국사 담당성징(湛堂聖澄)
(10) 혜감(慧鑑)국사 만항(萬恒, 1249∼1319)
(11) 자원(慈圓)국사 경린(景麟)
(12) 혜각(慧覺)국사 경총(景聰)
(13) 각진(覺眞)국사 복구(復丘, 1270∼1355)
(14) 정혜(淨慧)국사 복암(復庵)
(15) 홍진(弘眞)국사 선현(禪顯)
(16)고봉(高峰)국사 법장(法藏, 1350∼1428)이다
송광사 가람 배치도
亞(아)자형 가람배치도
송광사에는 삼대명물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있다.
비사리구시와 쌍향수, 능견난사가 송광사의 삼대명물인데
비사리구시는 옛날 스님들의 밥을 퍼 놓았던 용기로 비사리 구시는 큰 통나무를 잘나내 말구유처럼 만든 것이다.
쌍향수는 천자암에 있는 향나무이다.
능견난사는 그릇인데,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어떻게 포개도 다 겹쳐진다고 한다.
또 송광사에는 국사전이 국보 제56호로, 약사전이 보물 제302호로, 영산전이 보물 제303호로, 하사당이 보물 제263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전체 전경
선암사에서 출발하여
굴목재를 넘어오니
드디오 송광사 팻말이다
좀더 미리 알았더라면 보리밥집에서 천자암으로 걸어 내려 올걸....
한적한 송광사 입구
양옆으로 대나무밭이 시원스럽게 맞이 한다.
송광사 맞은 편
화엄전영역을 따라 고풍스런 담장이 눈이 간다.
화엄전 영역
닫혀져 있는 문...
그냥 지나가야겠다.
송광사 후문...출입을 금한다는 팻말때문에 출입이 가능한 곳을 찾아..
척주당(滌珠堂-오른쪽)과 세월각(洗月閣-왼쪽)
경내로 진입하기전 우화각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도 없는 척주당과 세월각
척주당(滌珠堂)은 '구슬을 씻는다'는 의미로 남성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동향(東向)을 하고 있으며 대웅보전을 향하고 있다.
세월각(洗月閣)은 '달을 씻는다'는 의미로 여성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북향(北向)으로 일주문을 보고 있다.
이 당우는 천도재를 지낼 때 관욕이라는 의식절차가 있는데
바로 이 곳에서 관욕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세수, 양치, 해탈복으로 갈아있기 등의 의례 절차를 거친다.
침계루(枕溪樓)
계곡을 베고 누운 누각이라는 이름처럼 길이가 다른 8개의 기둥이 개울의 경사에 맞춰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춘송광 추해인"이라느 말이 있다
봄볕에 찾아 드니 누각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벚꽃이 아름답다.
붉은 기둥과 파란색 창문의 조화에도 송광사의 절제가 엿보인다.
아침일찍 선암사를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송광사에 이르자 마음이 쿵쿵거린다.
개천쪽 현판에는 침계루 안쪽 현판에는'사자루 獅子樓'라고 표기 되어 있다
스님들의 공부방이라고 하는데 꽃내음과 바람소리, 물소리를 벗삼아 잠이 들것 같은 풍경이다.
침계류의 꽃담
꽃잎 부분이 비어 있다.
기왓장으로 만들었고 환풍구역활을 하는 곳이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의 생각한 선인들의 지혜이다.
송광사 조계문(松廣寺 曺溪門)- 일주문
조계문은 송광사의 첫 관문으로 일주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일주문은 신라말에 처음 세운 것을 1310년, 1464, 1676년 1802년에 고쳐 지었으며 현재의 조계문은 양식상 180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계단 좌우에 세운 돌짐승은 그 형태가 모호하여 사자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하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니 행동과 마음을 경건히 해야 한다. 일주문에는 편액이 2개 걸려있다. 위에는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曺溪山 大乘禪宗 松廣寺)이고 그 아래 뒤편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曺溪叢林)의 편액과 일주문 속의 용 일주문 뒷면 선암사처럼 일주문에 담이 있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임경당 임경당앞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해우소로 가는 길
능허교(삼청교) 위에 세운 우화각(羽化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9 호 계류를 건너 경내로 들어가는 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길 이 다리를 건너는 선승의 그림자가 물위에 비치면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같다는.... (사진 퍼옴) (사진 퍼옴) 원송광사의 능허교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것이 위 사진에 나오는 엽전 세 냥 이야기이다.
능허교 밑을 보면 용이 새겨져 있는데 물길을 통해 절 안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제아하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엽전 세 냥이 철사에 꿰어 매달려 있다. 이 엽전에는 절 살림의 반듯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1707년경 돌다리를 세울 때로 추정된다. 다리 불사를 위해 예산을 세우고 한 푼 두 푼 시주를 받았다. 이렇게 모인 시줏돈으로 불사를 마치고 보니, 엽전 세 냥이 남았다. 공사는 끝났지만 남은 돈이 문제였다. 시줏돈을 다른 일에 쓰는 것은 호용죄(互用罪)라고 해서 계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에 돌달이 아래 손이 닿지 않은 용머리에 철사를 꿰어 남은 돈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훗날 돌다리를 보수하거나 새로 건립할 때 보태 쓰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 목경찬의 들을수록 신기한 사찰 이야기 중에서 퍼옴 -
우화각(羽化閣)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삼청교위에 지은 건물로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지은 건물이다. 우화각이란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신선이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화각 천정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우화각에는 사군자의 대가이신 해강선생의 '송광사' 현판이 그려져 있다.
우화각에 바라본 계곡위의 오색등 멀지 않아 석탄일이 다가오는 탓인지 물위의 오색등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오른쪽 건물은 임경당이다.
사천왕문 우화각에 붙어 있다. 탑을 든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南方增長天)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北方多聞天) 칼을 든 동방지국천(東方持國天),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보물 제1467호로 지정 조선시대에 조성된 4구의 사천왕상으로, 2004년 복장(腹藏) 조사에서 각종 전적류와 인본다라니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에 쓰여진 명문과 복장유물 등의 분석을 통해 1628년(인조 6)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4월 28일 보물 제1467호로 지정되어, 송광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대게 흙으로 빚거나 나무로 깎은 목조이다 그런데 송광사 사천왕상은 목조로 만든것에 흙을 덧대어 입힌 목조토대의 소조 조형이다. 우리나라 절에서 만나는 사천왕상은 옹기로 굽거나 철기나 석기로 만든 것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의 사천왕상은 단 한위도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법화문구기 인왕호국반야경소법형초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복장유물 일괄 보물1468호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전체적인 해체보수 과정에서 불복장 유물을 수습하였는데
그 결과 복장전적 12종 14책, 인본다라니 383장,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복장유물 중에서도 사천왕상(四天王像) 출토 복장전적은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성격을 밝히는 새로운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종고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송광사 종고루(鐘鼓樓)- 불전사물(목어, 운판, 법고, 범종)을 모셔놓음
밖에 보았던 침계루의 안쪽이다 스님의 수행공간이라 출입이 삼가 되고 있지만 열려 있는 문으로 살짝이 안쪽을 살펴 보았다. 바깥쪽 현판은 침계루 안쪽 현판은 사자루 강원 그 안쪽에서도 또 대나무 담으로 공간을 분리시켜 두었다 승보 사찰답게 스님의 계율이 엄격한 것 같다.
약사전쪽에서 사자루 강원의 출입문
성보각과 종고루 사이의 감로수"한붕화상" 물 한모금에도 정신을 집중하여 수행을 하기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종고루 왼쪽 성보각(성보박물관) 1997년에 개관했는데 현재 국보(4건)4점, 보물(19건)135점, 전남유형문화재(9건)38점, 전남기념물 1점 천년기념물 1점, 도지정 (10건)39점등 총 6천여점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번문 불교박물관이다.
해우소에서 바라본 성보각(앞)과 승보전(뒤)
능견난사(能見難思) "보고도 못만든다"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능견난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능견난사는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발우세트이다. 송광사3대명물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
대웅보전(大雄寶殿)
사적 제506호 종고루를 지나 중정에 들어서면, 송광사의 중심전각이자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자형(亞字形) 대웅보전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대둥전은 신라 때부터 있어왔으나 수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거친 후 8차 중창시의 원형그대로 중정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년 대웅전 자리에 규모를 넓혀 신축하면서 그 명칭도 대웅보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송광사 대중보전은 우리 건축역사상 목조건물이 지닐수 있는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배제하여 설계한 현대 목조건물이다.
대웅보전(大熊寶殿)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울 모신 집(전각)이란 뜻이다. 대웅(大雄)은 고개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였다. 108번뇌를 끊으라는 뜻으로 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을 지었고 亞자형의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건축양식의 수작으로 꼽힌다.
중앙에는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여, 미래불인 미륵불의 삼세불(三世佛)을 주존으로 모셨으며 문수, 보현, 관음, 지장등 4대 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다. 석가모니 후불탱, 과법연등불후불탱, 미래미륵존불후불탱 삼세불의 뒤에는 1987년 금어 석정(石鼎)스님이 그린 석가모니 후불탱, 과법연등불후불탱, 미래미륵존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앞의 법수로 사자상
대웅전의 연화초석위에 배흘림기둥
연화초석, 그리고 승보사찰이므로 수행중인 스님을 위해 "조용조용"
대웅보전의 꽃살문 대웅보전의 꽃살문과 희끗하게 빛바랜 연꽃문양 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끈을 달아둔 것이 정겹다.
지장전(地藏殿)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하면서 승보전과 함께 좌우 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로, 중건이전에는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었다. 삼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3칸 규모의 건물로서, 원형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고 1출목의 주심포와 그 사이에화반을 둔 일반적인 맞배건물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은 2.4분합의 빗살문을 창호로 가설하고 전면을 제외한 3면을 판벽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지장전 내부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상단 촤측에 영단이 설치되어 있어, 돌아가신 이의 천도를 위한 모든 재식(齋式)은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다.
지장전 측면 정면5칸, 측면3칸,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건물 원형주초위에 배흘림 기둥이다.
영산전(左)과 약사전(右)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모든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 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있는 우리나라 법당중 가장 작은 이 약사전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의 건물로 추정한다.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년)에 세웠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이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앞면3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넣은 구조가 기둥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보여 주고 있다. 승보전(僧寶殿) 승보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직적 건물로, 6025이후 중창된 대웅전을 옮겨 지은 건물이다. 초창 당시의 모습은 알 길이 없고 7차 중창시인 1961년에 주지 금당화상(金堂和尙이 중창한 후 1988년 8차 중창 이전까지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이 대중보전을 지으면서 원형 그대로의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승보전이라 하였다. 건물외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건물로, 민흘림기둥 위에 외3출목과 내4출목의 다포를 올린 웅장한 모습이다. 전면에 빗살로 단장한 4분합의 창호를 가설하고, 3면의 외벽에는 심우도를 단청하여 송광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을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승보전 내부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면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송광사 절집에는 3가지가 없다(三無) 풍경, 주련, 탑 비사리구시 행사때 승려와 대중이 공양할 밥을 저장했던 통이며, 1724년 전북 남원에서 태풍으로 쓰러져 있는 싸리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은 재질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해보니 느티나무로 밝혀졌다고 한다.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다. 송광사 3대명물의 하나이며 승보전 옆에 놓여 있다.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로 꼽히는 '비사리 구시"는 국재를 모실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목조 용기이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가 송광사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승보전 외벽 삼우도단청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우측 상단에 자리한 관늠전은 1903년에 성수전(聖壽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1955년 관음전으로 바뀌었다. 설립 당시는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을 맞아 사액(賜額)된 황실 기도처의 역활을 하였다. 다듬어진 3단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건물로서, 약간 가공한 막돌초석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양식의 공포를 얹은 화려한 모습이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합의 창오와 중앙 석축앞 거북모양의 계단석이 특이하며 3면의 건물 외벽에는 고종황제의 축수를 기원하듯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한 화려한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목조건물이라 화마가 무서워 '海' '水'를 써 넣은 것으로 보아 목공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관음전 내부 관세음보살 죄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왕과 비인 고종황제와 명성왕후를 상징하고 있다 관음전 내부에는 다른 법당과 달리 불단을 감실(불단의 좌우에 벽을 만들어 방과같이 만들어준 공간)로 만들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관자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뜻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관음전 소맷돌 사자상?, 거북이상?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한다는 해와 달 관음보살 좌우에 그려져 있다. 관음전 내부의 화조도와 산수화 관음전 내부벽화 품계도 조선후기 품계도는 일반사찰에는 볼수 없는 특이한 벽화이다. 관음전 외부벽면의 십장생 송광사 해우소 내부에는 신발을 벗고 화장실 전용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야 한다.
무무문無無門-'없는 것이 없는 문'이라는 뜻이다.
무무문에서 바라본 효봉영각 이 사리탑은 현대의 고승 효봉(曉峰)스님의 사리탑으로 효봉영각 앞에 세워져 있다. 1968년에 세운 이 탑은 인도 아쇼카왕의 석주(石柱)를 모방하여 세운 것으로 우리나라에 그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탑신에는 '曉峰大宗師舍利塔'이라 당호를 새겼다. 탑신을 덮고 있는 옥개는 단판의 연화문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인도 아쇼카왕의 석주에서처럼 사자가한 발로 법륜을 짚고 서있다. 제자들이 효봉스님의 사리를 거두어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에 사리탑을 만들어 나누어 모셨다. 초대종정 효봉스님 종정은 불교종단에서 최고의 권위를 말한다.
무무문에서 바라본 국제선원구역의 이층구조 중현당
스님의 수행공간 송광사에는 승보사찰답게
스님의 수행공간이 많고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 여느사찰처럼 경내를 거니는 스님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규모에 비해 조용하다 스님의 수행 정진을 위해 풍경, 탑, 주련이 없다 오직 수행공간에서 불법과 묵언수행하시는 승보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옆 스님의 수행공간
관음전옆 국제선원 구역의 중현당
대웅전에서 바라본 국사전, 그옆으로 보이진 않지만 풍암영각 그리고 지장전 옆으로 운월루가 있다.
국사전의 출입문인 불일문과 운월루
운월루 대웅전 뒷편 설법전(금강계단)과 수선사 이 수선영역은 보조국사 정혜쌍수를 이어받는 승려들의 참선 공간이므로 송광사를 명실공히 승보사찰 답게 하는 곳이다. 대웅전 뒷편 설법전(좌)과 수선사(우) 진여문眞如門-수선영역으로 들가는 문 '바른뜻을 보이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문이다. 설법전設法殿 정면은 설법전 좌측은 금강계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모든 사찰들이 승려들의 참선공간을 가람옆이나 뒷쪽에 두고 있지만 송광사는 대웅전보다 높은 공간의 깊숙히 위치하고 있다. 승보사찰의 송광사는 정혜결사 정신을 수용하는 선종사찰로 승려들의 참선공간을 대웅전 뒷쪽 전각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수선사(修禪舍) 송광사 선원인 수선사(修禪舍)는 고려시대 지눌 보조 국사께서 흩어진 승려들의 선풍을 바로 잡으려고 결사 정진을 하려는 의지로서 선원의 이름을 修禪舍라 현판을 걸게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송광사는 대한민국의 삼보사찰중이 숭보사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영산전 옆 보수중인 건물
환풍을 위한 솟을지붕이 지혜롭다. 자제원慈濟院-송광사 종무소
무무문에서 바라본 종무소 송광사 우중 풍경
송광사를 오기 위해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렸다 오전 선암사를 들러 천년불심길을 걷고 굴목재를 넘어서 송광사까지 걸어서 걸어서 왔는데 경내에 들어 얼마가지 않아서 날이 컴컴해지고 여름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 이곳저곳 살피느라 우산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다가 무무문 정자에 갇혀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컴컴한 날씨때문에 사진이 흐리고 이곳저곳 다 돌아보지 못해 많이 아쉽다. 그래도 내 발자욱을 찍으며 돌아본 송광사 소경들... 다음에 또 찾아 올때까지는 이사진이 나의 특별한 보물이 될 것이다. . . . 빗속에 갇혔다가 빗속에서 풍경을 보았다 나를 홀로 두어야 나의 밖에서 무심히 지내던 풍경을 내속으로 끌어 들인다. 해우소에서도 풍경을 가까이 하였도 연등숲에 갇혀서도 연등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비의 풍경을 보았다. 일주문안 수호신처럼 서있는 편백나무 한그루 다 돌아보지 못하고 비때문에 비를 맞으며 일주문을 나섰다. '조계총림대도량' 아래에는 '불일증휘 법륜상전'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이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 항상 굴러라! ' ' ' 몰라서도 못본게 많고 몰라도 돌아보며 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비때문에 그만 돌아서 간다. 부처님의 문턱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려있어도 모두가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에 다 얻을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 크기를 알지못함이며 부처님의 연은 쉬운듯하면서도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열려있는 문으로 언제든 다시 발길을 옮기라는 뜻이라 여기리라 사진을 정리하면서 자료를 찾다보니 얻게되는 여러가지 문화재와 불전... 이 귀한 것을 마음에 넣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다시 오게 되리라. 2015.4.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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