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4.5.24. 교동도 화개사

kyeong~ 2015. 5. 30. 01:47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 새주소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1.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공부한 곳
    강화군 교동면 화개산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창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 문인의 문집에 교동 화개산의 사찰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은 교동의 ‘화개산’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목은집>에는 14세 때인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2년)에 친구 2명과 함께 책을 싸들고

    바다 건너 교동 화개산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喬桐華蓋山。十四歲所居也。/ 今司憲韓侍史,民部張議郞, 及余三人者。負?入海中喬桐華蓋山。]

    교동 화개산이라 했을 뿐 구체적인 공부 장소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산중의 독서처(讀書處)는 사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가 교동을 주제로 지은 한시(漢詩) 중에 ‘화개산’, ‘승방(僧房)’이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편 1932년 간행된 <속수증보 강도지>에는 목은 이색 선생이 공부한 곳이 ‘화개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화개산에는 고려시대에 이색이 공부하던 사찰이 있었고,

    그 화개산 사찰의 전통은 오늘날 화개사(華蓋寺)가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조선시대 5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명맥이 유지된 사찰.
    조선시대 전기 이래 화개산 남쪽에는 ‘화엄사(華嚴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1890년대 에 ‘화개암(華蓋庵)’, 이후 ‘화개사(華蓋寺)’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대인 1481년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 교동 화개산에는 화엄사와 안양사가 있었다.

    이 사실은 1530년(중종25)에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고, 1656년(효종7)에 <동국여지지>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1760년(영조36)에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화엄(암)사가 교동부 관청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있다고 했을 뿐,

    안양사의 기록은 빠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람고>에도 안양사는 빠져 있는데,

    1799년에 나온 <범우고>에는 화엄사와 안양사 모두 화개산의 절이지만 안양사는 폐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18세기 중반 경에 안양사는 폐허되고 화엄사가 화개산의 유일한 사찰로 유지되었다.


    한때 화엄사는 화개산 북쪽으로 옮겨져 재운암(載雲菴)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1842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가 화개산 남록에 있다는 기록이 다시 보여,

    화엄사는 오래지 않아 화개산 남쪽으로 되돌아 온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871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를 스님 한 사람이 홀로 지키고 있다 했으니,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95년에 간행된 <교동부읍지>의 불우(佛宇)조에는 화개산 남쪽, 교동부 관청

    북쪽에는 ‘화개암(華盖菴)’이라는 사찰 한 개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개산 남쪽에 위치한 사찰 화엄사가 화개암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어렵게 유지되어 오던 절을 중창하면서 산 이름으로써 절 이름을 삼아 고쳐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3. 일제시기의 화개사
    1928년에는 개분(改粉) 불사를 시행하였다.

    오랜 세월로 훼손된 불상의 표면을 새로 입히고 장엄하는 개분불사를 했다는 사실은,

    불상을 봉안해 온지 오랜 기간이 지났다는 점과 불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약 10년이 지난 1937년 당시 화개암은 법당 1동과 요사 1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높다란 법당은 기와가 깨지고 기둥도 기울어 보수가 필요하였으나,

    재정 여건이 어려워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불상과 불화는 요사에 옮겨져 있었다.

     

    3칸(間) 22평의 요사에는 철제아미타불좌상 2점,

    철제관세음보살좌상 1점과 후불탱화, 미타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절 소유의 토지는 답(畓)이 3,663평, 대지 163평으로 합계 3,826평이었다.
    불상과 불화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토지도 3,800여 평에 달하여 것으로 보아,

    오랜 전통을 지닌 사찰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 사실들은 1937년 3월에 전등사(傳燈寺) 본사와 말사의 사지(寺誌)를 편찬할 당시,

    집필자 안석연(安錫淵)이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화개암을 답사하고 남긴 화개암지(華蓋庵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 석조부도가 있음
    화개사 경내에 조선시대에는 조성된 석조 부도 1점이 있다.

    새겨진 글씨를 찾을 수 없어 어떤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전체 형태가 아주 간략화 되어 탑신부만 있는 자그마한 규모의 석종형(石鍾形) 부도이다.

    5.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래 줄곧 사격(寺格)을 유지해온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이다.

     교동읍성 안에 있던 교동부 관청의 바로 북쪽,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개사는

    수백 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교동 주민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이었다.
    화개산 남쪽에 교동향교와 나란히 화개사가 자리하고 있다.

    교동향교가 교동 주민의 교육문화의 중심지라면, 화개사는 신앙 생활과 수행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교동향교와 더불어 화개사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수행의 공간이고,

    교화의 공간이며 주민의 안식 공간이다.

    화개사는 전통 사찰로서의 존엄성과 수행 환경이 존중되어야 하며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각종 공사나 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화개사가 ‘전통사찰’로 등록되고, ‘전통사찰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국가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수행 환경과 자연 풍치가 보존되기를 기대한다.

     

     

    교동남로길에서 화개산 방향으로 접어들면

    이내 읍내리 비석군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은 교동향교

    왼쪽은 화개사길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화개사에 들었다가 화개사 뒷길 화개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교동향교로 내려온다면 운동도 되고 교동앞바다까지 바라보는 기회까지 얻으리라.

     

     

    처음으로 찾아든 교동도

    교동도의 화개사는 일주문이 없는 작은 절집이다.

    작은 주차장에 일주문처럼 서있는 아카시아나무 향이 짙은 저녁무렵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화개사

    연등이 아름다운 절집이다.

     

    고려시대에 창건한 사찰이라는데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워낙 규모가 작다보니...

     

    주차장에서 바로 올라가는 길은 닫혀 있고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화개산 아래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화개사가 있다

     

    절집만 만나면 반가운 이마음

    절집은 언제나 풍경 좋은 곳에 앉아 있기마련

    낯선곳의 여행길에서 흡족한 풍경을 만나지 못했다면

    절집을 찾으면 된다.

    그곳은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수련이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략 수령이 200년 되었다고 하는 소나무

    화개사 초입에는 소나무 보호수가 서있다.

    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

     

    뜰앞에는 석탄일을 반기는 대형꽃바구니가 놓여있다

    내일이 석가탄신일...

    섬의 작은 절집이라

    불자들이 보이지 않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마당에는 작약이 오월을 그리고..

     

     

    유난히 하얀등이 많다

    돌아가신 영가를 모시는 분이 많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법당안에 잠시 인사를 했다

     

    범종각이 따로 없고 실내에 작은 종...

    종만 찍었다

     

    화개사 스님이 내부 찍는 것을 싫어한다는 귀띰때문에

    그 뜻을 소중히 여겨 법당내부는 찍지 않았다.

     

     

    법당옆 요사채

     

     

    불두화와 연등...

    그리고 그앞에는 교동도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가 훤하게 보인다

     

     

     

    마주보이는 산은

    강화도 별립산

     

    산정상에 군부대 시설물이 보여

    고려산인가 했는데

    위치를 잘못 인식한 탓이다.

     

     

     

     

    10여분이면 다 돌아볼 화개사

    작은 암자같은 절에

    연등이 꽃처럼 피어 있어서

    외롭지 않은 절집이다.

     

     

     

    그 사찰이 얼마나 오래되었고

    그 세월을 말해주는 듯..

    오래된 느티나무도 한그루 있다.

     

     

    암자처럼 조용한 절집

    연등은 바람결에 나부끼는데

    내일이 석탄일이라도

    북적대지 않고 조용하다

    그 흔한말

    절간같이 조용함이 묻어나온다.

    .

    .

    .

    ,

    .

    .

     

     

    화개사를 돌아나오는 길

    화개사와 교동향교의 갈림길에 위치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지역의 목민관 등의 공직자들을 위해

    교동 관내에 세워진 비석들을 1991년경에 현재 위치인 읍내리로 이전하여

    비석군을 이루며 관리 중에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설명없이 수십개의 비석을 낮은 가드레일 안에 모아두었다.

    강화나들길9코스中 교동1코스 다을새길에 포함되어 있는 화개사...

    꼭 다시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된다면

    교동2코스 머르메길도...

    길만 보면 욕심이 나고

    언제 저길을 다 걸어볼까...

    마음에 담아 두면 언젠가는 갈길이 열린다는 믿음때문에

    여기 또 오리라는 확신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