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6.9.3.토. 계룡산 갑사

kyeong~ 2016. 9. 3. 03:09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찰, 갑사 *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km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거리에 있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암시해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계룡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리워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십대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인 것이다.

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이 났던 절이었으며,

세조 때에는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전소되었으며,선조37년 (1604)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 주위에는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자대 등 수려한 경승이 줄지어 있으며 특히 남쪽 계곡은 이른바 9곡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전각배치도




오랫만에 계룡산을 찾았다

겨울에 오고 잎이 무성한 계절에 오기는 첨인것 같다.

오전 10시경 비교적 조용한 시간 일주문을 들어선다

갑사....그 이름만으로도 갑이 되어 거닐것 같은 느낌의 사찰에 들어서니 왠지 기분이 좋다.



오리숲을 걸어서 갑사로 간다

연화문양이 있는 다리를 건너 시원한 숲길

보기만 하여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길이다.


원래 강원도행 약속이 잡혀있었지만  호우주의보로 인하여 방향을 틀었는데

불가의 인연은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축복받은 삶이다.



사천왕문

절로 들어서는 3문(門) 중 일주문 다음에 위치하는 대문(大門)


줄여서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이 문 안에는 그림 또는 조상(彫像)한 사천왕을 봉안하게 된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고대 인도의 신이었던 그들은 불교에 채택되면서부터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護法天王)의 구실을 맡도록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천왕문내에는 동방 지국천(持國天)이 검(劍)을, 북방 다문천(多聞天)이 비파(琵琶)를, 서방 광목천(廣目天)이 탑을,

남방 증장천(增長天)이 용을 쥐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절에 이러한 천왕상을 봉안한 천왕문을 건립하는 까닭은 절을 외호한다는 뜻도 있지만,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가지게 하려는 데도 뜻이 있다.

또한, 수행과정상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일심(一心)의 일주문을 거쳐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따로 금강문(金剛門)을 세우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천왕문의 입구 문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모습을 그리거나 따로 금강역사상을 봉안하여 금강문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왕역사(仁王力士)를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가람수호를 위한 제일 관문의 신이다.




갑사에서 언제나 가장 멋진 풍경이 되어는 범종각과 돌담

춘마곡 추갑사....이풍경에 단풍이 드리워졌을때의 풍경을 본 사람은 그 여운이 오래 남을 것이다.


대웅전쪽에서 바라본 범종루

여기는 범종루이며 보물로 지정된 동종은 따로 종각에 보관되어 있다.



갑사동종 (甲寺銅鐘)

1584년 작. 보물 제478호.

 높이 131cm, 입지름 91cm. 전체적인 형태는 어깨부분에서 몸통부분까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몸통부분부터 하단까지는 직선으로 되어 있다.


종의 윗부분에 음통(音筒)이 없으며, 사실적으로 조각된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한 채 용뉴를 이루고 있다.

어깨 위에는 입상(立狀)의 물결무늬가 돌려졌고 그 아래 상대(上帶)에는 복련의 연화무늬와 둥근 원 안에 새겨진 범자 31자가 차례로 돌려져 있다.


유곽(乳廓)은 일정한 간격으로 상대와 분리된 사다리꼴이며, 그 안에는 각각 9개의 유두가 3열로 배열되었고, 가장자리는 복잡한 당초무늬로 장식했다.

각 유곽 밑에는 꽃 모양의 원형 당좌(撞座)가 있고 그 밑을 구름무늬가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당좌 사이로는 석장(錫杖)과 보주를 든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구름 위에 서 있다.

구연부에서 조금 올라온 곳에 두 줄의 선으로 구획된 하대에는 반쯤 핀 보상화문과 활짝 핀 보상화문이 교대로 당초무늬 띠를 이루면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유곽과 보살상 사이에 양각된 명문에는 종을 만들게 된 동기나 주조연대, 사용된 쇠의 무게, 시주자의 이름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동종은 신라와 고려종의 기본적인 형태와 양식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조선 초기의 동종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종의 윗부분에 음통(音筒)이 없으며, 사실적으로 조각된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한 채 용뉴를 이루고 있다.

(백과사전 펌사진)



갑사 현판이 걸려있는 지장전(강당으로도 쓰인다)

* 갑사 강당
도지정유형문화재 제95호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돌담이 이쁘고 건물이 아름다운 길을 따라 한바퀴 돌듯 돌아오르니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안내판이 있다

지장전 계단으로 올라도 되나....돌담을 따라 돌다보니 옆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대웅전으로 들어가본다



절집을 오랫동안 지키듯 서있는 노송

위엄이 하늘을 찌를것 같다.



갑사 대적선원

일반인의 출입금지구역

이곳은 스님들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불경들이 많으며 스님들이 수련을 하는 곳이다.


대적은 열반하다, 번뇌에서 벗어나 진리 깨닫는 불생불멸() 높은 경지.라는 뜻이다




갑사의 귀중한 보물 월인석보목판 (보물582호)

보물 제582호.

『월인석보』는 세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명하여 한글 반포 후 8개월 만인 1447년 7월에 완성한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이 지은 가송체(歌頌體)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다시 편집하여

 1459년(세조 5)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국역 불교성전(佛敎聖典)이다.


현존하는 월인석보목판은 총 46판이다. 2판을 제외한 대부분이 판의 양면에 2장(張)씩 배열되어 4장씩 새겨져 있으며

마지막 장이 223장이기 때문에 모두 57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1판 42장은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경판과는 달리 양쪽에 마구리(물건의 양쪽 머리의 면)를 별도로 만들어 부착하지 않고 통판을 사용하여

본문을 새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서 마구리를 만들었다.


[의의와 평가]

『월인석보』는 전 25권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18권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인출본(印出本)으로 유전하는 것이라서 현재 상태로서는 목판을 확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갑사의 월인석보목판은 판목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월인석보』의 간행·유통 양상을 실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예술품으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판목은 백개만이라는 천민이 자기 집에서 판각한 가각판(家刻板)으로, 현존하고 있는 『월인석보』의 판목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왼쪽 요사채와 오른쪽 관음전의 모습



관음전


관음전내부

이곳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며

관음전 뒷편 전각에는 갑사삼신불괘불탱이 모셔져 있으며

평소에는 들어가 볼수 없어서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사진으로 대신한다.


갑사삼신불괘불탱 甲寺三身佛掛佛幀


국보 제298호. 세로 12.47m, 가로 9.48m. 삼베 바탕에 채색. 1997년 9월 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괘불은 절에서 법회나 의식이 있을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화를 말한다.

이 불화는 대웅전 불상 뒤의 목곽 내에 보관해 두었다가 행사가 있을 때 꺼내서 사용한다.


갑사삼신불괘불탱은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三身佛)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표현했다.

이 불화는 상·중·하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맨 윗부분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가운데에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이,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삼신불은 등 뒤로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치켜 올라간 눈, 작은 입이 도드라진다.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지만,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의 머리 모양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윗부분은 붉은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시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 위에 서 있다.

아랫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만이 배치되어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보인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괘불은 1650년(효종 원년)에 경잠·화운·응열(應悅) 등 8명의 화원이 제작했으며 1771년에 보수, 1976년에 부분적으로 수리했다.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공양시주 및 괘불 조성에 필요한 물품 시주자들이 기록되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갑사에 소장되어 있다.





관음전 옆 소박한 요사채

금방이라도 노비구니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올것 같은 느낌이다.





갑사 삼성각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의 삼성(三聖)을 봉안하고 있는 사당 형태의 건축물이다.

대개 이 삼성을 따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갑사에서는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였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수명장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산신은 한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의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우물 마루 바닥 위에 불단을 설치하여 칠성 탱화 좌우로 산신 탱화와 독성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갑사 대웅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정면 5칸(15.98m),

측면 3칸(9.89m)의 맞배지붕의 다포집. 높이 1.8m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가운데 3칸에는 띠살문의 사분합(四分閤) 쌍여닫이문이 있고 양 옆 협간(夾間)과 측면 앞 칸에 분합문(分閤門: 마루나 방에 설치한 큰 문)을 달았다.

배흘림을 준 둥근 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고나서 그 위에 주두(柱頭)를 놓았다.


공포(栱包)는 안팎 3출목(三出目)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에는 2개씩, 양 협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내고주(內高柱)를 세우고 그 위에 동자기둥[童子柱]을 얹어 마루보를 받쳤으며, 이 마루보에 의지하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대웅전 내부

내부는 트인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내고주열(內高柱列)에는 후불벽(後佛壁)을 만들고 그 위쪽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2015. 대웅전 불상에서 유물이 나와서 지금은 지렇게 자료조사중이다.




▲ 갑사 대웅전 소조관음보살입상과 감마레이 촬영 사진. 사진=불교문화재연구소.(퍼옴)

공주 갑사 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삼세불상 안에서 고려시대 경전 발원문, 후령통 등의 성보가 대량 발견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정안스님)는 지난 10일

충남 공주 갑사(주지 화봉스님) 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삼세불상의 협시인 소조관음보살입상의 복장정밀조사를 실시한 결과

 1387년에 필사한 백지묵서금강반야바라밀경, 1352년에 처음 찍어낸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 권 8~10,

소자본 묘법연화경 권1~3 등 고려시대 주요 경전들이 대거 발견됐다고 17일 밝혔다.


갑사 대웅전 소조삼세불상과 협시보살상은 17세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대형 소조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동안 제작시기와 제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에서 갑사 대웅전 불상들은 1617년에 수화승 행사(幸思)의 주도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며

 “지금까지 행사는 순천 송광사 삼존불상(1614년, 현재 소실)과 해남 도장사 목조삼존불좌상(1648년) 조성 때 보조화승으로 참여한 이력만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로 행사가 수화승으로 독립해 활동하였으며 갑사 소조삼세불상과 협시보살상이 그의 대표작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조사 과정 중 후령통은 납입 당시의 원형인 경전으로 감싼 형태가 발견되었으며, 후령통 주변에는 여러 경전과 다라니가 납입된 사실을 확인했다.

 경전 중에서는 1387년에 필사한 백지묵서금강반야바라밀경, 1352년에 개판된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 권8-10,

소자본 묘법연화경 권1-3(고려후기) 등 고려시대 주요 경전이 발견됐다.

특히 보살상 목부분에는 묘법연화경 권1-3 1책이 둥글게 말린 상태로 나왔다.

이번 조사는 공주시청과 (재)비산문화재 주관으로 실시되는 갑사 소조삼세불상과 협시보살상의 보수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 발원문, 화원 및 1617년(만력45년) 조성 기록.



▲ 후령통




대웅전에서 바라본 모습

정면- 강당(지장전), 우-진해당, 좌-적묵당





적묵당

갑사 종무소





진해당



진해당 : 고통의 바다(海)에서 중생들을 건지는(振) 집(堂).

내부에는 약사불을 모신 불단이 있다고 하나 내부를 볼수는 없다

뒷편으로 여러채의 요사채와 팔상전이 있다.



진해당와 대웅전 뒷편 요사채로 가는 길



철지난 연꽃이 뉘엿뉘엿 가을을 맞고 있다.

아직은 많이 덥고 여름같이 푸르른 날이지만

연잎에는 가을이 물들고 있다. 사람보다 더 촉이 빠른 연꽃이다.


대웅전 맞은편 강당(지장전)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5호


정면 3칸(9.09m), 측면 3칸(3.94m)의 맞배지붕건물. 공포(栱包)는 다포식(多包式) 안팎 2출목(二出目)이다.

자연석 위에 덤벙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위에 배흘림을 한 둥근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창방(昌枋)을 짜올렸다.


건물 입구에는 기둥 사이 아래쪽에 머름중방을 설치하였으나 문설주에 단 문짝은 많이 변형되었다.

양 옆칸의 문미(門楣 : 창문의 위틀) 바로 위에는 교창(交窓 : 낮은 창)이 있다.

가구(架構)는 평방 위에 2출목으로 공포를 짜올려 도리를 받치는 한편, 평주(平柱) 사이에 대들보를 걸치고 기둥 4개를 세워 이를 받쳤다.


대들보 위쪽의 천장은 판장천장(板張天障)이다.

공포의 모양은 외부 첨차의 쇠서[牛舌]가 비교적 곧바르고, 내부 살미첨차는 운궁형(雲宮形)으로 만들어 연꽃을 조각하였다.


갑사 강당

담장 바깥쪽에서 찍은 모습


강당 정면 상부에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 내부



갑사 강당의 윤장대 輪藏臺


윤장대는 경전을 넣어둔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있게 만든것으로

이것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수 있다고 한다.








대웅전을 벗어나 뒷편으로 보이는 요사채로 발걸음을 옮기니 팔상전과 표충원이 눈에 들어온다

노란상사화가 서둘러 피어서 반기는 갑사에는 볼것이 많이서

하루의 시간을 다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랫듯이산행길에 급하게 보고 지나야하는 것이 아쉽기만하다.



공주 갑사 표충원(甲寺 表忠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의승장으로 이름을 떨친 갑사 출신의 기허당 영규대사를 기리기 위해 1738년(영조14)에 건립되었다.

표충원에는 기허당 영규대사의 스승인 휴정,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과 함께 영규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있다.

문화재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52호





영규대사비와 표충원





표충원을 나와 바로위 팔상전으로 가는 길








팔상전 출입문



팔상전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개의 장면으로 표현하여 봉안하고 있는 사찰의 주요 전각 중 하나이다.

조형성이나 기법으로 보아 건축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조선 말기의 소규모 다포식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팔상전 내부

석가모니 일대기



팔상전내의 요사채



팔상전앞 요사채







팔상전 주변의 노랑상사화




보장각(寶藏閣

 보장각은 사찰성보문화재를 전시하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갑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봐야 한다.



보장각 맞은편 해우소

옛날 변소라 담아보았다.




갑사 사적비甲寺史蹟碑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의 내력을 적어놓은 사적비로 ‘崇禎十七年甲申後十六年己亥九月日立(숭정17년갑신후16년기해9월일입)’이라는 기록이 있어 1659년(효종 10)에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비신에는 전행무장현감(前行茂長縣監) 홍석구(洪錫龜)가 전서체로 쓴 ‘公州鷄龍山岬寺事蹟碑銘(공주계룡산갑사사적비명)’이 있고, 문장은 비신의 4면에 새겼는데, 이 비문은 여주목사 이지천(李志賤)이 짓고, 전 공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썼다.

비명에 ‘鷄龍山岬寺’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절의 이름이 현재와 같은 ‘甲寺’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사 부도군



갑사 부도군

18기는 조선시대의 승탑 형태인 석종형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들부도는 명문을 통해 탑의 이름과 건립시기를 알 수 있으나 글씨가 지워져 판독이 불가능한 부도도 있다.

현재 탑명과 건립시기를 모두 알 수 있는 부도로는 현은당부도(1657)와 낙서당부도(1815)가 있다.


부도란 불교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묘탑을 말한다.

부도의 어원은 불타를 뜻하는 붓다 또는 불탑을 뚯하는 수투파에서 유래되엇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 시신그을 홪아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식 장례법이 생겨남에 따라 부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승탑인 부도는 사찰주변에 조성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사찰을 둘러보고

조금이라도 앎을 얻게 된것에 마음이 흡족하다

많이 알아내는 것보다 하나라도 얻고가는 오늘이 뿌듯하다





계룡산 안녕~

갑사 안녕~


몰라서 찾아보지 못한 갑사의 보물들



철당간및 지주/보물 256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갑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철당간 및 지주.

원위치에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단은 단층으로 크고 길쭉한 두 장의 돌을 결구하여 만들었는데 장방형으로 되었다.

지금도 윗면의 접착부분 두 곳에는 두 장의 돌을 결구시켰던 쇠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측면 사방은 상하에 굽을 돌려 정연한 규격을 보이는데, 좌우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을, 앞면·뒷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음각하였다.

윗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고, 양 지주 사이의 밑바닥 부분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竿臺)가 있다.


윗면의 중심이 되는 이 부분의 형태는 원좌로서 그 주변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다.

양 지주는 동서로 마주서 있는데, 마주보는 내측면과 외면, 그리고 앞뒤 측면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는 소박한 지주이다.

정상부의 윗면은 평평하고 외측면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크게 죽여서 원만한 사분원을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킨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뚫어 장치하였는데, 철제당간의 오절철통(五節鐵筒)을 굵은 철사로 세번 돌려서 고착시켰다.

당간은 지름 50㎝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으로 현재 24마디가 보이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는 28개의 철통이었으나 1893년 7월 25일 4마디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공주갑사승탑公州甲寺僧塔 보물 제257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


높이 2.05m. 현재 갑사 중심부에서 벗어나 계곡을 건너 남쪽 경내에 있으나 본래는 갑사의 뒤쪽 계룡산중에 있었던 것이다.

원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현위치로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