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6.11.12. 월출산 도갑사

kyeong~ 2016. 11. 12. 23:21


기기묘묘한 월출산

월출산 산성대탐방코스가 개방되고 그길을 걷고자

또 남도행 길을 떠났다

천황사에서 월출산 산성대코스를 느릿느릿올라 그리고 정상을 지나 도갑사까지 긴 종주길

좀 늦은 출발이라 도갑사까지 예정된 산행시간을 쫒기게 되었다

도갑사가 그리웠던 것인데 날은 저물고 아쉬운 마음에

경포대쪽으로 하산하여  2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내고 도갑사로 달렸다

어둑어둑한 시간 그래도 경내로 들어갈 수있어서 행운이다

사진이 전부 어둑하게 나왔지만 나름 기록을 남기려 애를 쓴 것이다.

시간을 내어 돌아보면 좋겠지만

가는김에 급하게 시간을 쪼개어 절집을 들러보는 것도 내겐 큰 기쁨이고 만족이다

많은 것을 보고 얻는것보다 관심과 노력으로 절집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얻어가는것에

크나큰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동안 저물가는 절집을 얼마나 급하게 돌아보았는지.....

그래도 이렇게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이 내겐 부처님을 만나는 것 같이 좋은 시간이 된다.


2016.11.12. 월출산 산성대코스를 탐방후 도갑사에 들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56년(세조 2)신미(信眉)와 수미(守眉)가 중건하여 전부 966칸에 달하는 당우가 들어섰으며,

부속암자로 상동암(上東庵)·하동암·남암(南庵)·서부도암(西浮屠庵)·동부도암·미륵암(彌勒庵)·비전암(碑殿庵)·봉선암(鳳仙庵)·

대적암(大寂癌)·상견암(上見庵)·중견암·하견암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점차 옛 전각에 대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명부전(冥府殿)·미륵전(彌勒殿)·국사전(國師殿)·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이 중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은 1473년(성종 4)에 중건하였으며, 좌우에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미륵전 안에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도갑사소장 동자상이 있다.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과 뒤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 2기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도선·수미의 비가 있다.

이 중 도선·수미비는 비문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에 건립을 시작하여 1653년(효종 4)에 완성한 것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하여 주목을 끈다.


또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된 수미왕사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석조(石槽)가 있다.

이 절의 주위에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九井峰)의 9개 우물,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슬퍼한 제자들이 왕인이 공부하던 동굴입구에 새겼다는 왕인박사상 등이 있다.

절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갑사 전제 전경

도갑사 홈페이지 사진 퍼옴




도갑사 전각배치#1


도갑사 전각배치#2



도갑사 국보와 보물및 문화재자료

해탈문-국보 제50호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보현보살 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오층석탑-보물  제1433호 

대형석조-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도선수미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


삼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절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우리나라 사찰에는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깨달음이 있는곳

어둑어둑해진 도갑사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알수 있는데까지 풀어보고자 한다.

월출산 도갑사 의 정문임을 알리는 일주문

'월출산도갑사'라고 편액이 적혀있다.





뒷모습에는 '덕해문(徳解門). 국중제일선종대찰(國中第一禪宗大刹)'이라고 적혀있다.



해지는 길 사진이 흔들린다

그래도 소중한 시간 그대로 편집하기로 했다.

모두 퇴근한 모양이다

그덕에 입장료를 내지 않았다





도갑사 해탈문 道岬寺 解脫門,

보물 제 50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도갑사는 월출산에 있는 절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도갑사 해탈문 (국보제50호) 표지석


해탈문을 안 왼쪽편 도선국사성보문화관

늦은 방문으로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를 볼수 없었다




해탈문 내부에는 사대천왕이 있어야 하지만

두개의 천왕은 소실되고 대신 동자상이 설치되어 있다.

위의 두개의 동자상은 도선국사성보관에 보관된 보물 제 1434호인 소조동자상의 모조품이다




해탈문내 소조동자상과 사천왕상





도갑사 광제루(廣濟樓)

도갑사의 불이문(不二門)격인 광제루이며 이층누각이다

광제루 옆으로 길다란 행랑채 건물이 늘어서 있다.




경제루

이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었으며 광제(廣濟樓)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대웅보전 마당에서 본 경제루



대웅보전쪽에서 바라본 광제루와 오층석탑


대웅보전앞에는 2기의 석등이 있다.



해탈문을 지나

경제루를 통과하며 바라본 대웅보전




대웅보전


도갑사는 조선 초기인 1456년만 해도 전각과 요사채가 966칸에 이르렀던 대찰이었다.

그뒤 정유재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1977년 대웅보전마저 전소됐다.


단층이었던 대웅보전은 1981년 복원됐으나, 법당이 불안전한 상태라 주지 월우 스님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2006년 3월30일 대웅보전 중창불사 기공식을 시작으로 단층 대웅보전을 해체하여 외부중층, 내부통층의

550여 년전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2009년 4월 11일 오전10시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외부 중층, 내부 통층(내부 높이 18m), 다포식팔작지붕,

250여㎡(74평) 규모의 중층건물(지상 18m, 아파트 6층 높이)로,

 

법당 안에는 높이 3m 크기의 삼신불(중앙: 석가여래좌상,좌측: 약사여래좌상, 우측: 아미타여래좌상)과

홍송(紅松)으로 조성된 높이 6m 길이 1m 규모의 목조 후불탱화가 조성되었으며,

수미단과 법당문에는 아름다운 각종 꽃들과 12지신상,인물상,벽사문양 내외 벽화,등으로

장엄하여 반야용선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다.


목탑양식의 국내 현존하는 법당으로는
①외부가 2층으로 된 전각으로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 극락전, 보은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구례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장흥 가지산 보림사 대웅보전.
②외부가 3층으로 된 전각으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진천 보련산 보탑사3층목탑, 지리산 문수사3층목탑).
③외부가 3층으로 된 전각으로는 보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현존한다.

 

★ 십이지신상 [十二支神像]
십이지라는 개념은 중국의 은대(殷代)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를 방위(方位)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대체로 한대(漢代) 중기의 일로 추정된다.

다시 이것을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개[戌]·돼지[亥] 등

열두 동물과 대응시킨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에 와서는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를 조각한 석재 및 토우가 묘지장식에 나타났다


대웅보전


대웅전과 오층석탑




대웅보전의 화려한 벽화




법당 안에는 높이 3m 크기의 삼신불(중앙: 석가여래좌상,좌측: 약사여래좌상, 우측: 아미타여래좌상)과

홍송(紅松)으로 조성된 높이 6m 길이 1m 규모의 목조 후불탱화가 조성되었으며,

수미단과 법당문에는 아름다운 각종 꽃들과 12지신상,인물상,벽사문양 내외 벽화,등으로

장엄하여 반야용선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다.



도갑사 오층석탑-보물 제1433호.



도갑사 오층석탑

보물 제1433호.

현재 도갑사 대웅보전과 해탈문 사이 앞마당에 있는 석탑으로 중축선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껴있다.

동남쪽으로 오래된 큰 나무가 있어 탑이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02년 이전에는 기단 하부가 지하에 매몰되어 있었으나

목포대학교에 의해 이루어진 4차 발굴기간인 1999년 9월에 세진당 뒤편에서 일제시대 도면에 있었던 석탑 자리를 확인하였으며

그곳에서 하층기단과 하대갑석을 수습하였다.

조사 내용에 의하면 이곳도 원 위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2002년 2월에 발견부재를 보강하여 2중 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하였다.

2005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정이 해제되고 보물 제1433호로 재지정되었다.





심검당

해탈문을 들어서면 대웅보전 오른쪽 전각이다.


심검당 뒷편은 지혜당



미소당(微笑堂) -현재 승방(僧房)으로 사용되고 있는 요사채




향다각(香茶閣) 2001년에 지어진 요사채




천불전(千佛殿)

정면3칸, 측면3칸,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의 대웅보전을 새로 짓기전에 위치하고 있덩 옛 대웅전의 전각이다.

천불전 내부



명부전

명부란 지옥을 의미하므로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전각을 명부전이라 부른다.




지장보살삼존상의
왼쪽에 홀수 대왕인

제1 진광대왕·제3 송제대왕·제5 염라대왕·제7 태산대왕·제9 도시대왕·태산부군·판관·장군상이 있고,

오른쪽에 짝수 대왕인

제2 초강대왕·제4 오관대왕·제6 변성대왕·제8 평등대왕·제10 오도전륜대왕·직부사자·판관·녹사가 있다.

 

통례적으로 명부전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삼존상이 봉안되고

시왕과 시봉(侍奉)을 드는 동자 10위, 판관 2위, 녹사 2위, 사자 2위· 장군(金剛力士像) 2위 등을 봉안한다.




명부전과 삼층석탑


천불전옆 삼층석탑

대웅보전 뒷뜰에 있는 고려시대 탑으로 높이는 255cm 이다

대웅전앞에 있던 것을 근래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단층기단에 3층의 탑신과 상륜을 모두 갖췄다.

기단은1매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1매의 갑석으로 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별도로 마련했고,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오객석 받침의 1~2층응 3단이며 3층에서는 2단으로 줄었다.

옥개석 일부분은 많이 파손되었지만,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 상륜부에 노반과 복발, 그리고 옥개석 비슷한 석재가 놓여 있다.


산신각



산신탱화



수리중인 국사전(國師殿)

국사전은 고승들의 진영(眞影)을 모셔놓은 전각이다.

도갑사 국사전에는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도선국사道詵國師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


[활동 사항]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는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서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서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859년(헌안왕 3)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청암사를 창건하였다. 37세가 되던 863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898년(효공왕 2) 세수 72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사상과 저술]
도선국사는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국사의 생존 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도선국사가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는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도선국사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가 도선국사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술로는 『도선비』,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국사 진영




수미왕사(守眉王師)

법명은 수미(守眉), 법호는 묘각(妙覺)이다. 영암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가계와 정확한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13세에 월출산(月出山) 도갑사(道岬寺)에서 출가한 후 교학에 뜻을 두고 수학하다가 선종으로 전향하였으며, 세조(世祖) 대에 판선종사(判禪宗事)로서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고, 왕사에 책봉되었다. 태조(太祖) 대의 무학(無學)과 더불어 조선 전기의 드문 왕사 책봉 사례로서, 세조 대 불교 중흥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생애와 행적]
수미의 행적은 도갑사 수미 왕사비[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52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세속을 멀리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가 13세가 되던 해에 월출산 도갑사로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에 교학에 뜻을 두어 강원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信眉)를 만나 도반으로 삼고 함께 수학하였다.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곧 교학 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각처를 유람하며 선문에 출입하다가 등계(登階) 정심 선사(正心禪師)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기존의 억불 정책이 완화되고 불교 진흥 정책이 취해졌는데,

이때에 수미는 판선종사가 되어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1457년(세조 3)에 본사인 도갑사로 돌아와 황폐화된 사찰을 중창하였다. 세조가 왕명으로 문도인 홍월(洪月)에게 불사를 주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응 대군(永膺大君)이 시주(施主)가 되어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듬해에는 신미, 학열(學悅)과 함께 해인사 대장경을 50부 인출하여 명산 각처에 배포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대장경의 인출과 『월인석보』 간행은 세조의 의지에 의해 추진된 불사로서, 이 역시 수미와 조선 왕실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 준다.


도갑사 중창 이후 수미는 이곳에 머물며 종풍을 크게 선양하였다.

세조는 이에 묘각(妙覺)이라는 법호와 자색 가사(紫色袈裟)를 하사하고 왕사로 책봉하였다. 입적 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수미왕사 진영



수미왕사 비각



도갑사 수미왕사비

道岬寺守眉王師碑-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52호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 세워진 수미 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한 비.
도갑사 수미 왕사비(道岬寺 守眉 王師碑)는 1633년에 영암군의 도갑사에 세워진 비석으로

조선 세조 대 왕사(王師)를 지낸 묘각 화상(妙覺和尙) 수미(守眉)의 행적과 도갑사 중창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세조 대 흥불 정책의 상징적 인물인 수미와 왕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도갑사 수미 왕사비는 ‘도갑사 묘각 화상비’와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 화상비’로도 불린다.

1987년 6월 1일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도갑사 수미 왕사비는 가로 160㎝, 세로 175㎝ 크기의 방형 대좌와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귀부의 등 가운데에 장방형의 비좌를 설치하고 이수(螭首)[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를 갖춘 비신를 올렸다.

귀부의 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되어 있으나 목이 짧고 도식화된 형식이다.

눈방울이 부리부리하여 용맹스러운 인상을 주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빨이 두드러진다.

귀갑(龜甲)은 벌집 모양의 육각문으로 몹시 두껍게 조각되어 있으며,

앞발은 약간 벌려서 ‘八’자 형으로 뻗어 나왔고 발톱은 앞발과 뒷발 모두 5조(爪)이지만 역시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신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으며, 전면 상단에 13.5㎝ 크기의 글씨로 ‘월출산 도갑사 묘각 화상 비명(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본문은 모두 19행이고 해서체로 새겼다. 비신 위에 놓여 있는 이수는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형태인 팔작지붕형이 아닌 방형으로 밑면에 3단의 고임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구름무늬가 섬세하게 양각되어 생동감을 준다. 네 모서리에 날아오르는 듯한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며,

전면 중앙에는 한 쌍의 용이 싸우듯이 서로 뒤얽혀 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박진감을 느끼게 한다.


[내용]
비신의 전면에는 수미 왕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는데, 출생과 출가, 교학 연구에서 선 수행으로의 전환한 배경과 수학 내력, 속리산 법주사에서 도반 신미(信眉)와의 만남, 조선 전기 억불 정책이 시행되던 상황에서 판선 종사(判禪宗事)를 역임하면서 종문을 지켜낸 업적과 비의 건립 과정 등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특히 본사인 도갑사에 돌아와 머무는 동안 세조가 수미의 문도인 홍월(洪月)에게 중창 공사를 주관하게 한 것을 계기로

황폐하던 도갑사가 크게 중창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비의 전액과 본문 모두 백암 성총이 짓고 썼다.

후면은 시주질(施主秩)로서 비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지역 인사 및 승려들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수미왕사비쪽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새로 건립한지 얼마되지 않지만

석탑과 거목이 수호신처럼 도갑사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어둑해진 시간 좀더 살펴보고 싶은데 날은 자꾸만 어두워진다.




도갑사 범종각(梵鐘閣)

범종(梵鐘)은 천상과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염원으로 봄종에 지장보살과 관세움보살을 새기기도 한다


법고(法鼓)는 북으로 네발달린 짐승을 비롯한 육지 중생을 제더하기 위해 사용한다.

운판(雲版)은 청동이나 철을 사용하여 구름 모양으로 만든 판으로 날아다니는 중생이나 허공을 떠도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친다

목어(木魚)는 나무로 만든 큰 물고기 모양으로 수중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물고기는 늘 눈을 뜨고 있듯이 수행자도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도갑사 석조

길이 467㎝, 너비 61㎝, 높이 110㎝.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네 모서리의 각을 죽인 긴 타원형에 가까워 전체적인 모습은 주형(舟形)과 비슷한데,

하단부도 각을 없애고 호형(弧形)으로 돌려 밑면에 이르면 거의 반원형이 되게 하였으며,

석조 밑바닥에는 구멍을 뚫어 물을 사용하고 난 뒤에 물을 빼내게 되었다. 현재는


도갑사 대웅전 뜰 앞에 두고 물을 담아 우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이 석조의 외부 남쪽면에 ‘康熙二十一年 壬戌三月日作 施主 愼密□鹿敬□□將德尙書記□人 □主□□石寺刻千金(강희21년 임술삼월일작 시주 신밀□녹경□□장덕상서기□인 □주□□석사각천금)’이란 3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석조의 제작연대는 1682년(숙종 8)임을 알 수 있다.






석조(石槽)의 오른쪽부터  강희21년 임술 (康熙二十一年 壬戌) 이라고 새겨져 있다.-숙종8년(1682)을 말하는 것이다.




도갑사 사적비


도갑사 입구 일주문 옆 팽나무

오래된 선승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수도하는 스님같은 팽나무를 끝으로 도갑사의 초질주 답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