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寺

2017.1.14.토 선운산 선운사 내 참당암과 도솔암

kyeong~ 2017. 1. 14. 19:47


선운산에는 선운사만 있는 줄 알았다

선운사에는 동백꽃이 피거나 상사화가 필때에만 가는 줄 알았다.

올겨울처럼 눈 보기 힘든 겨울

선운산에 눈이 온다기에 따라나선 산행길

선운사에는 여러번 와봤기에 낯익은 모습으로 절집 담옆을 지나 선운산으로 향했다

이길도 두번째 아는 길 눈밭을 걷는 기분으로 산길에 들었다.

이정표에 참당암이라고 있다

가고싶었는데 산행경로는 다른 곳으로 잡혀 있었다.

일행을 따라 우연히 잘못들었다

그래서 참당암을 만났다

불가와의 연을 가진지라 반가운일이다

꼭 가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길을 내어주는 절집...

참당암에서 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참당암의 절 이름은 참 독특하다.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표상으로 볼 때 선운사가 가장 낮으니 ‘지장地藏’이고,

참당암은 ‘인장人藏’이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에는 ‘천장天藏’이 모셔져 있다.



참당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에 있는 조선 후기 선운사 참당암의 중심 불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부재와 치목(治木), 기법 등으로 보아 고창 선운사 대웅전보다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이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중간 정도 가다가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약 300m 지점에 선운사 참당암이 있다. 참당암 중앙에 대웅전이 있다.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선운사 참당암은 581년(성덕왕 28)에 의운(義雲)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백제 말기에 창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폐허가 되었다가 1329년(충숙왕 16)에 중창하였다.

1982년 번와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753년(영조 29)에 다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수할 때마다 기존의 부재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이다. 앞면 길이 1,080㎝, 측면 길이 830㎝, 주고 303㎝, 주초 높이 40㎝ 등이다.

앞면 120㎝ 높이의 석축 기단에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을 세웠다. 앞면 주간(柱間) 폭은 중앙이 440㎝, 좌우의 칸이 각 320㎝로, 네 개씩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고주 위에는 다시 주두(柱頭)와 동자주(童子柱)를 올려 용마루를 받치게 하였고, 주두에는 창방보를 걸었다.

앞면의 퇴량(退樑)과 창방보 사이에는 용을 조각한 화반이 끼워져 있다.

이러한 공포(栱包) 형식은 고려 시대의 다른 다포계 건물에서도 보인다. 그중 하나가 투심조(偸心造)의 잔형으로 보이는 기법인데,

투심조란 출목 선상에 벽체와 평행이 되도록 놓이는 첨자를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뒷면의 공포는 앞면과 비교해 1출목 첨자가 생략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을 보인 반면,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중앙부는 높고 툇간 쪽은 한 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천장이다. 천장 아래로 노출되어 있는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형성한 후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에는 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오른쪽에는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본존으로, 관음보살좌상과 세지보살좌상이 좌우로 안치돼 있다.

삼존불은 1561년(명종 16)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후불탱화인 「영상회상도」는 1900년에 조성되었다. 1984년 11월 26일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시에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선운사를 거쳐 참당암에 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그토록 선운산에 오면서도 참당암에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다음에 온다면 저기 참당앞을 거쳐 낙조대까지 걸으리라





선운사 도솔천을 따라 바로 가는 길도 있고

선운산을 올라 산길로 갈수도 있다

산을 좋아하는지라 선운산 능선을 따라 참당암에 가기로 했다.



선운산 마이재에서 참당암쪽으로 가야한다

석상암앞....눈이 내린탓인지 참 고요한 시간이다.





마이재에서 능선을 따라 참당암 이정표를 따라 걷던중 전망대에서 눈내리는 선운사풍경을 볼수가 있었다.







원래 참당암에 오려고 했었던것은 아니지만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참당에 발길을 하게 되었다

길을 잘못드는 일이 가끔은 참 감사한 일일때도 있다


참당앞 입구 거대한 돌 표지석

한자가 지워져서 잘 읽을수가 없다

시간날때 자료를 찾아봐야 겠다.




대숲이 담처럼 둘러쳐진 참당앞

길이 넓어서 누구나 접근하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참당앞 뒷산은 개이빨산...



한겨울탓인지

눈이 내리는 고요한 절집

인적이 없다

그래서 더 고요한 절집앞에서 눈을 밟으며 다가간다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보물 제803호)...오른쪽건물은 응진전과 명부전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부재와 치목(治木), 기법 등으로 보아 고창 선운사 대웅전보다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이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의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이다.

앞면 길이 1,080㎝, 측면 길이 830㎝, 주고 303㎝, 주초 높이 40㎝ 등이다. 앞면 120㎝ 높이의 석축 기단에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을 세웠다.

앞면 주간(柱間) 폭은 중앙이 440㎝, 좌우의 칸이 각 320㎝로, 네 개씩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고주 위에는 다시 주두(柱頭)와 동자주(童子柱)를 올려 용마루를 받치게 하였고, 주두에는 창방보를 걸었다.

앞면의 퇴량(退樑)과 창방보 사이에는 용을 조각한 화반이 끼워져 있다.

이러한 공포(栱包) 형식은 고려 시대의 다른 다포계 건물에서도 보인다.

그중 하나가 투심조(偸心造)의 잔형으로 보이는 기법인데,

투심조란 출목 선상에 벽체와 평행이 되도록 놓이는 첨자를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뒷면의 공포는 앞면과 비교해 1출목 첨자가 생략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을 보인 반면,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중앙부는 높고 툇간 쪽은 한 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천장이다.

천장 아래로 노출되어 있는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형성한 후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에는 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참당암 대웅전 내부

내부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본존으로, 관음보살좌상과 세지보살좌상이 좌우로 안치돼 있다.

삼존불은 1561년(명종 16)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후불탱화인 「영상회상도」는 1900년에 조성되었다.

1984년 11월 26일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웅전과 오른쪽의 응진전을 한걸음 물러서서 다시한번 남긴다

눈내리는 날과 절집

고요와 묵언과 가벼움이 어울리는 날이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도솔선원



도솔선원

참당암의 거주하는 스님이 머물며 생활하는 곳 이다

 현재 사용하는 선원이 있기 전에는 도솔선원의 현판이 있어으나

 지금은 작은 대중방과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있어

 안거중에는 스님분들이 거주하고 있다.

 

도솔선원 마당에서 바라본 참당암 풍경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다소 겨울바람이 차더라도

저기 돌의자에 앉아서

선운산을 넘어오는 바람과

참당암에서 흘러나오는 불경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곳이다.



응진전과 명부전


대웅전 바로 옆의 명부전도 특이한 형태의 전각이다.

가로로 긴 형태의 명부전은 지붕은 낮고 기둥간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명부전과 응진전의 한지붕 두가족임을 알게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총 6칸의 건물이지만 각 3칸씩 응진전과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측 3칸 응진전은 기둥 간격이 우측 3칸 명부전 보다 기둥 간격이 좁다.

법당의 성격에 맞추어 자유롭게 계획한 것이다.

이 또한 재목하나라도 아끼려는 고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참당암 명부전 내부



참당암 응진전(나한전)내부





명부전 뒤 지장전(약사전)

약사여래불상이 모셔져 있는 참당암 지장전


선운사 참당암 약사전안에 있는 이 불상은 높이 80cm이며 무릎으이 폭은 50cm이다

머리에 두건을 썼으며 이마에는 목이 좁은 띠를 둘렀다.

이마에 백호가 있고 얼굴은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양볼은 상당히 살이 쪄 있다.

양귀는 눈썹꼬리 윗부분에서부터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냘프게 처리되어 있고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는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콧날은 오똑하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유연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배쪽으로 구부려 엄지와 인지 및 장지로 보주를 들고 있고 왼손은 무릎위에 가볍게 올려 놓았다.

발은 결가부좌를 하고 무릎과 다리위에 엎여진 의상의 주름은 매우 두껍게 되어 있다.

보물 제 279호 금동보살좌상과 제 280호 지장보살좌상등과 유형이 같은 것으로

약사여래상이라기보다는 옥제 지장보살좌상이함이 옳을듯하다.





응진전 뒷편 지장전의 내부

(전북유형문화제 제33호)


지장전 안 석조지장보살좌상, 광배를 제외하고 온전히 남아있는 불상으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 뒷편의 지장전은 한때 약사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조 지장보살이 문둥병을 낫게 해준다는 소문이 나 약사보살로 불린 듯 하다.

하지만 지금은 선운사 삼장지장신앙의 인장 지장보살로 지장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아주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예전에 비해 건물은 축소되었지만 이전 건물에 있던 기둥을 그대로 사용하고 칸 수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참당암의 건축적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대웅전은 고려와 조선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부재라도 버리지 않으려는 검약 정신의 결과로 오

히려 시간을 축적하고 역사를 담는 고차원적인 건물이 되었다.

 

명부전과 응진전 역시 재정적 결핍이라는 장애요인을 전혀 개의치 않고 연립 불전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통쾌하고 극복하고 있다. 

부족한 자재를 서로 잇대어 건축한 선운사의 만세루와 함께 참당암의 거칠지만 자유로운 건축들은 물질 만능시대에 물들어 사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참당암 입구 요사채




선운산 낙조대로 가는 길

생각지도 못한 참당암을 만났다.

월급보다 보너스가 더 반가운 그런 느낌이다.

눈이 내리는 절집에서 잠시 부처님의 느낌을 받고 다시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그저 가볍다.





낙조대와 천마봉으로 가는 길

도솔암이 눈에 들어온다

눈과 바위와 어우러진 도솔암

먼발치서도 그저 반가운 그림이다



그림같은 바위에 도닦는 스님같이 앉아 있는 도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