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9.5.25. 문경새재길

kyeong~ 2019. 5. 28. 00:56

 

 

 

 

 

문경새재길

알고는 있지만 띄엄띄엄 아는 길

주흘산 가느라고 들렀던 길

조령산 가느라고 들렀던 길

부봉 영봉 가느라고 들렀던 길

어디에 어떤 형태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1관문에서 3관문까지 연결해서 걸어본적은 없다

조령산 산행을 하는 날

도보팀은 문경새재길을 걷는다고 한다

무릎이 아프던터라 반가운 도보길이다

시원한 신작로를 따라 선비처럼 뒷짐지고 팔자걸음으로  걸어도 되는 길

무릎은 아파도 힘든길이 아니라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찬란한 연둣빛 잔치를 끝내기도 전에 더위가 찾아들었다

아름다운것은 오래 머물지 않나보다

좋은 계절을 급하게 밀어내고 이른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루종일 나무 그늘을 따라 걷는 길이니 더위는 나무그늘길을 이기지 못하리라

 

 

조령산행은 제1관문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흔히들 이화령에서 시작한다

높은 고개에서 오르니 그만큼 힘이 덜들기 때문이다

산행팀을 위해서 이화령에서 잠시 머문디

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향했다

 


이화령 梨花嶺

이유릿재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다

 

이화령의 높이는 548m이고, 소백산맥의 조령산(鳥嶺山, 1,017m)과 갈미봉(葛味峰, 783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동쪽사면은 조령천(鳥嶺川)의 곡구(谷口)인 진안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통하고,

서쪽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으로 흐르는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Daum백과]

 

 

이화령에는 휴게소가 있고 전망대가 있다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길

고속도로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지점이 545미터 고지이니 조령산까지는 약 500미터 오르면 되는 곳

지나는 길에 잠시 조령산을 올라보는 것도 좋겠다

 

국토종단 자전거길을 만든 이명박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기념비가 있는 곳

정치의 잘잘못을 떠나 국민 레져활동의 큰부분을 차지하는 자전거길을 낸것은  좋은 일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은 갈미봉

오른쪽은 조령산

마음이야 조령산을 오르고 싶지만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길을 택하는 일이 나를 위한 길

 

 

이화령에서 문경새재 1관문 주차장까지 15분거리

 

문경새재도립공원 제1주차장

많은 사람들이 찾은 곳이므로

대형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다

 

 

 

문경새재길

약도에 나와있는 많은 이정표들

저 많은 과거를 다 알수 있을까만은

하나하나 살피며 걸어볼량이다

 

 

 

선비들의 과거길

선비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곳곳이 서있다

오늘은 선비가 된 기분으로 걸어봐야겠다

바닥에 태극기 문양이 있어서 들어설까하다 말았다

태극기를 밟는다는 기분이 좀 그렇다

 

 

1관문에서 2관문까지는 고도가 그리 높지 않다

거의 평지를 걷는 기분으로 걸어가지만

2관문에서 3관문까지 오르는 길은 신작로길이라 경사가 완만한듯하여도

높이 600고지가 넘는 조령까지는 계속 오름길이다

신작로길과 산길 2개의 길이 있는데 옛 과거길을 느끼기에는 산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가뭄이 들었다

말라있는'초곡천'

저 물길이 시원하게 열려있으면 새재길을 걷는 동안 한층더 시원할것 같다

 

 

선비상과

과거길이라는 표지석

우리나라 과거길의 대명사격인 문경새재길

 

 

드디어 제 1관문

주흘산 등산길에 와보고 참 오랫만이다

제1관문은 보수중

진입을 막아 두어서 옆길로 걸어야했다

 

 

문경관문 聞慶關門

사적 제147호.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 1,106m)을 넘어 중원의 연풍(延豊)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 천험의 요지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고,

관문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1708년(숙종 34)에 세운 제1관문에는 ‘主屹關(주흘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제1관문에서 3㎞ 떨어진 곳에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 있다.

중성은 1594년(선조 27)에 축성된 것이며, 제2관문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좌우 협문이 3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넘는 험로 중의 하나인 조령(鳥嶺)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제3관문,

즉 조령관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제1관문 이외 제2·3관문은 허물어져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제2관문을, 1977년 제3관문을 각각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적의 진로를 차단함에 있어 험준한 조령을 막지 않고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하여 조령에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해 오다가 숙종 때 비로소 3개의 관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세 관문의 성안에는 군사들의 진지(鎭址)·군창지(軍倉址) 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상감사가 교대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도 남아 있다.

[Daum백과]

 

 

제1관문 주흘관은 보수중이라 우회해서 걷느라

성벽만 찍었다

옛성벽은 전부도 돌이다

이렇게 큰돌을 어디서 구해다 쌓았는지

그러고보니 돌이 참 많은 나라이다

 

제1관문 ‘主屹關(주흘관)

1708년(숙종 34)에 세운 제1관문에는 ‘主屹關(주흘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제1관문은 육축(陸築 : 지면 위에 축조하는 것)에 홍예문을 열고,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초루(礁樓)에는‘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제1문은 3개의 관문 중 옛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Daum백과]

 

 

성에 꽂혀 있는 깃발을 보니

금방이라도 군사들이 힘차게 뛰어 넘어 올 것 같은 기분이다

 

 

산우들과 걷는 길

혼자보다 도란도란 즐거운 길

초곡천 위의 나무다리에서 서로 손흔들며 즐거워하는 길

 

 

 

워낙 넓은 길이라

아이들이나 걷기 힘든이들을 위해서

문경새재를 운행하는 차량이 있다

내가 이다음에 추억을 새기며 여기 온다면 저 미니차량을 타고 한바퀴 돌아볼 것 같다...

 

 

 

 

2관문으로 가는 길에

개울 건너 셋트장이 보인다

초가집  기와집등...

옛시대의 세상

과거보러가던길과 어울리는 셋트장이다

 

 

영화셋트장이지만

고택들이 모여있어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운동삼아 들러봄직하다

 

 

 

고려시대 사극 셋트장이라서

왕건교라고 칭하였나보다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32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있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에서 고려 시대 배경을 가진 사극을 촬영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2000년 당시 65,755㎡의 부지에 왕궁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으로 세운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세트장이다.

이곳에 세트장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문경시 가은이 후백제 견훤의 출생지이고,

주변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조영, 태조왕건,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공주의 남자, 광해, 낭만자객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을 허물고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하여 조선 시대 모습으로 새롭게 건설되었다.

또한 이곳은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에 있어 다양한 유적을 경험하고, 자연생태공원과 옛길 박물관 등 여러 문화시설을 즐기기 좋다.

[Daum백과]

 

 

 

문경새재길은 맨발로 걸어도 되는 길

흙의 시원함을 느끼며 걷는만치 걷다가

여기서 발을 씻으면 된다

한없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곳으로 오면 좋겠다

맨발로 걷다가

하늘보며 웃어보다가

물가에 앉아서 발까지 함께 담그어 보는 일

아무렇지 않은 하루처럼 보내겠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이팝나무같기도 한데...꽃이 지고 있는듯...

 

 

문경새재길은

바닥이 고르고 잔돌이 없어서 맨발 벗고 걸어도 된다

오르면서 정자가 많아 쉴곳도 많고 돌탑도 많다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런데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바위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악어바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령원지[鳥嶺院址]

 

 

 

 

조령원터

원()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길손이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의 원터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을 했으며 물물 교환 등 시장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540고지 이화령에서 조령산에 오르면 좀더 쉽게 오르겠지만

300고지 이곳에서 조령산에 오르면 땀꽤나 흘리지 싶다

3키로...긴거리는 아니지만 경사도가 급해서 쉬운코스는 아니다

 

 

 

제1관문에서 제 3관문까지 신작로같은 길을 걷다보니 고도를 느끼지 못한체 점차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642m 고지의  조령까지 가는 동안

다른둘레길과 달리 해발고도 표지판을 세워두었다

 

 

문경새재길을 걷다보면

군데군데 영남대로라는 이정표를 만날수 있다

 

영남대로란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중 하나이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요즘의 고속도로나 국도처럼

조선시대에도 도로명이 있었다

이기회에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에 6개의 대로에서 점차 대로의 숫자가 늘어난듯하다

 

 

조선시대 10대 간선대로

1로(一路)는 한양-고양-파주-평양-정주를 거쳐 국경 의주(義州)에 이르는 길
2로(二路)는 한양-원산-영흥-함흥을 거쳐 국경 두만강 하구 서수라(西水羅: 우리땅 山經 長白正幹의 종점)에 이른다.
3로(三路)는 한양-원주- 동해안 강릉을 거쳐 평해(平海: 현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이르는 소위 관동로(關東路)
4로(四路)는 한양-판교-용인-양지(陽智: 현 용인시 양지면)-광암-달내(達川;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충주로 흘러 남한강에 합수,

                     삼대 名水의 하나)-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 문경시 남쪽에 있음)-

                     낙원역-낙동진(洛東鎭: 현 상주시 낙동면)-대구-청도-밀양-황산역을 거쳐 동래(東萊), 부산(釜山)에 이르는 길,

5로(五路)는 한양—유곡역은 4로(四路)와 같고, 유곡역-상주-성주-현풍-칠원-함안-진해-고성을 지나 통영(統營)에 이르는 길


6로(六路)는 한양-동작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여산-삼례역-전주-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統營)에 이르는 길인데

                    한양에서 봐서 경상도로 가는 길 3개 중에서 오른쪽에 있다 하여 ‘경상우로(慶尙右路)’라 하였다.
7로(七路)는 한양—삼례역은 6로(六路)와 같고, 삼례역-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을 거쳐 수로로 제주(濟州)에 이르는 길.
8로(八路)는 한양-평택-소사를 거쳐 충청수영(忠淸水營: 현 충남 보령시 오창에 있었음)에 이르는 길
9로(九路)는 한양에서 강화(江華)에 이르는 길.
10로(十路)는 한양-충주를 지나 안동(安東)과 봉화(奉化)에 이르는 길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 데 큰 일조를 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이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듯 문경새재를 넘어서 과거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런 주막이 생겼고

지금 문경새재길에는 옛 주막집을 복원해 두었다.

 

 

 

화장실도 복원해두었고

우물도 복원해두었고

그옆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 잠시 즐기다 가라고

'투호' 놀이기구를 준비해두었다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서애 유성룡은 모두가 안동 태생이었다.

영남의 선비들이 모두 다 그러했듯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올라가고 고향에 다녀오려면 문경새재(鳥嶺조령)을 거쳐야 했었다.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오고 가다 보니 이들이 남긴 문경새재 관련 시조가 150수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승인 퇴계 이황은 숙조령(宿鳥嶺조령에서자다)이라는 제목으로,

제자 서애 유성룡은 숙조령촌점(宿鳥嶺村店조령시골주점에서자다)이라는 제목으로

새재를 건너던 중 숙박하면서 시조를 지어 후세에 남기셨다.

 

 

宿鳥嶺村店-서애 유성룡
숙조령촌점-새재에서 묵다

悄悄林風起 초초임풍기
泠泠溪響生 령령제향생
幽懷正迢遞 유회정초최
山月自分明 산월자분명
浮世身如寄 부세신여기
殘年病轉嬰 잔년병전영
南來還北去 남내완북거
簪笏愧虛名 참홀괴어명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37)~1607년(선조40)>
조선중기 학자ㆍ문신, 본관 풍산(豊山),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영의정 역임, 저서 『징비록(懲毖錄)』 등

 

 

주막앞에 있는 가축키웠던 '우리'

주막에서 쉴만큼 쉬고 다시 2관문을 향하여 다시 걸어본다

 

 

교귀정

허름한 주막과 정자를 만나다가

갑자기 궁궐에나 있음직한 크고 지붕이 하늘로 솟을 듯한 누각을 만나니

옛날 이런 산속에 왠 누각일까 싶다

명품 소나무와 어우러진 누각

이 소나무의 가지가 공작처럼 생겼다고 공작소나무라고도 한다

 

 

교귀정(交龜亭)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에 경상감사가 한양을 출발해 부임할 때 신, 구 경상감사끼리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곳이다. 신임 경상감사가 이곳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구 경상감사가 관인과 인계인수 물목을 적은 서책을 건네며 교인식(交印式)을 거행했다. 경상감사 도임 행차는 취타대를 선두로 해서 총 300 명 가량의 큰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귀정에서 그런 큰 행사가 치러졌다면 아마 이곳에는 정자 외에도 숙소 등 여러 시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인원이 문경새재를 걸어서 넘자면 중간에 숙박시설이 없어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옛날 같으면 여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 산을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이곳 교귀정에 멋지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비스듬히 자란 줄기는 S자 모양으로 휘어져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하다. 또 줄기 윗부분은 길 쪽으로 향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영해주는 모습이다.사실 사람들은 교귀정보다는 이 소나무에 훨씬 더 눈길을 준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김종직(金宗直)도 어느날 교귀정을 찾았던 것 같다. 그가 남긴 시 한 수가 전한다.

 



交龜亭上傲乾坤斗覺霜華點髮根一水宮商風自激千巖圖畵日將昏詩回寫景窮飛鳥淚爲傷懷讓斷猿南路已銷雙斥후月明今夜宿何村


교귀정에 올라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한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 부르고일천 바위는 그림 같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내가 시로써 경치를 읊으매 날 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나의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잔나비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남쪽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그 모양 사라져만 가는데아, 달도 밝은 오늘밤사 어디에서 머무를 것인고

 

 

 

교귀정앞 문경새재 맑고 깨끗한 개울을 보니

교귀정에 앉아 시한수 저절로 나올것도 같다

 

 

 

용담폭포앞 한시를 바라보노라니

한수한수 음미하며 새겨보고 싶었지만

홀로아닌 길이 어찌 여유를 부릴수 있을까

급한김에 사진이라도 찍어서 하나하나 아는듯모르는듯 살펴보았다

 

문경의 용담폭포
처다 보니 새재 길 아득히 멀고/ 굽어보니 구불구불 열 두 구비라
여기 이곳 용담폭포 참으로 볼만한데/ 폭포소리 물보라 앞 다투어 일어나네.

권오복(1467년~1498년)

새재의 용담을 지나며
우렁찬 폭포 소리 물 속에 잦아들고/ 에워싼 나무들로 그윽하고 깊어라
용아, 너는 예로부터 어떻게 닦았기에/ 지금 여기 누워서도 놀라지 않느냐?
홍언충(1473년~1508년)

 

새재에서 묵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본관 덕수, 호 율곡

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이 좋은 봄날에도 / 고향으로 못 가는데/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 바람 맞는구나
 김시습(1435년~1493년)

 

 

꾸구리바위

꾸구리는 물고기를 의미한다는데

물고기가 송아지를 잡아먹다....정말 그랬을까 싶다.

 

 

길은 아무리 걸어도 이런 풍경이다

6키로가 넘는 길이 단순함이 그지 없지만

구석구석 과거 선비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면

한번쯤 걸어볼만한 곳이다

맨발로 걸어볼수 있는 길이 얼마나 될까

비가와도 패이지 않도록 잘 다져서 만든 신작로길

그 길에서 맨발로 원시의 하루를 체험할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이길을 넘나들었으면

소원탑이 산을 이루었다

주흘산 영봉 부봉 이어서 산을 넘어가듯이

소원탑도 굽이굽이 산맥을 이루었다

 

 

두손 합장하고 나도 소원하나 빌었다

오래오래 길을 걷게 해달라고...

장원급제니 옥동자니...그런거 말고

아직 못가본 길 오래 오래 걷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산불됴심 표석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소백산맥의 조령 제 2관문 부근의 길가에 서있는 높이 183㎝, 너비 75㎝의 원추형 자연석으로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다.

정조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와 관방유지를 위해 서민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최초의 자연보호 표석이며 조선 후기에 한글을 새겨 넣은 보기드문 표석이다.

 

 

응암폭포와 물레방아

조곡폭포에서 통나무수로를 통해서 물을 끌어와서 물레방아를 돌린다

 

 

조곡폭포에서 물레방아까지 통나무 수로를 만들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담그게 된다

 

 

 

조곡폭포앞에서는 바지를 걷고 폭포속으로 걸어들어가보았다

발끝에서 전해오는 시원함

아무리 더워도 이길을 걷는 날은 시원하겠다

 

 

제2관문 조곡관앞

주흘산으로 가는 이정표

 

 

문경새재 절반의 위치 제2관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 ]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문경 조령 관문( . 사적 제147호) 중 두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이 논의되던 중,

1594년(선조 27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축조한 것으로 중성()이라고도 한다.

주흘관이나 조령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령관 보다는 남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중앙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고,

좌우에 높이 4.5m, 폭 3.3m, 길이 7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문루 뒤쪽에는 영남제2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곡관 편액

 

 

조곡관천장

 

 

조곡관 뒷편

 

 

부봉으로 가는 길

영남대로에는 한시가 있는 길

한자가 어려워 해석이 바로 되지는 않겠지만

오랫만에 학습을 해볼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겠다

다음에 온다면 저길로 들어서봐야 겠다

 

 

 


아리랑.... 이라고 하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이렇게 3가지가 대표적이지만
실제 지역이나 노랫말에 따라 60여가지 넘는 아리랑이 있다

 

아리랑의 한이 섞인 나라

지역마다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이 있는 나라

문경새재에도 아리랑이 있었다

 

문경새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좋아
큰애기 손 끝에 놀아논다

문경새재 넘어 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문경은 새재야 참싸리 낭구
꼬깜아 꼬지로 다 나가네

문경은 새재야 뿌억 싸리는
북어야 꼬지로 다 나가네

고대광실 높은 집도 나는야 싫어
울퉁불퉁 멍석자리 얕은정 주세

 

 

바위굴로 입구의 정자

지나가던 선비가 급하게 써준 글씨처럼

먹물이 흘러내리는 글씨

'청류세심'

맑은 물에 마음을 씻어내자

 

 

 

바위굴

바위굴은 새재우(雨)와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요즘도 젊은 청춘남녀가 이 바위에 함께 들어가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고 해 데이트코스로 인기다.

아담한 통나무다리를 지나면 퇴적암 형태의 큰 바위 아래 굴이 있는데, 굴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통나무를 받쳐 지지해 놓았다.

 

 

 

 

 

강원도에서 많이 보았던 귀틀집

첩첩산중이었던 이곳에서 귀틀집이 있었나보다

학습용으로 복원해둔듯하다

 

 

제법 고도를 높인 곳

 

 

여기도 상처를 가진 소나무가 있었다

합천 소리길에서도 길가에 서있어...일제의 아픈 흔적이 이리도 오래 가는구나

사람의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사는 소나무가 두고두고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길이 편하고 학습용으로

걷기위한 길로...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는 곳이다보니

몇군데 휴게시설이 들어서있다

 

 

3관문으로 가는 갈림길

오른쪽은 신작로길

왼쪽은 산길

일행을 따라 신작로길로 가긴 했지만

산길로 가는 것이 더 옛맛이 나는 길이다

산길로 가다보면 책바위가 있는데 신작로로 가면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펌사진)

책바위

책바위의 전설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
에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몸이 허약해 공부는 물론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부자는 한 도인에게 원인을 물어 본 결과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 르고 있기 때문에

 담을 헐어 그 돌들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기도를 드리 면 된다는 말에 따라

3여년간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문경새재로 나르게 했습니다..

 돌 을 나르다 보니 허약했던 아들은 몸도 튼튼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게되어 장원급제 까지 하여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후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장원급제의 소원을 이 책바위에다 빌며 과거길을 재촉 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 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책바위가 있는 산길로 올라오면

금의 환향길 이정표와 만나는데

책바위에 소원을 빌고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길이다

 

 

다음에 혹여 다시 간다면 신작로보다

산길 즉 금의 환향길를 택하는 것이 훨씬 옛스럽고 시원하다

가는 길에 책바위에 누군가를 위한 장원급제 소원도 빌어보구요

 

 

드디어 새가 쉬었다 넘는다는 조령

제3관문에 도착했다

마패봉과 깃대봉 사이의 넓은 안부에 시원하게 자리하고 있는 제 3관문이다

 

 

오월말이지만 오늘 일기예보는 영상30도를 가리켰다

조령산과 신선암봉을 타고 오는 산우님들을 기다리기 위해

제3관문에 놓여있는 평상에 앉아 있자니

한여름에도 서늘할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쉼없이 넘나들고 햇빛 또한 가장 깨끗한 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조령鳥嶺

높이 643m. 이화령으로부터 북쪽 약 7㎞ 지점인 조령산(1,017m)·신선봉(967m)·마폐봉의 안부에 위치한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하다 하여 새재·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영남지방에서 소백산을 넘어 서울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조선시대의 주요교통로였다.

 

 

제3관문 조령관

백두대간의 조령산 고개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새재라는 지명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새로 된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새재는 산새가 높고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경새재에는 1관문인 주흘관, 2관문인 조곡관, 3관문인 조령관 총 3개의 관문이 있다.

그중 3관문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때 중창한 3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불에 탔고, 홍예문과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Daum백과]

 

 

 

將向大丘覲親踰鳥嶺 (장향대구근친유조령)

 

崎嶇鳥嶺似羊腸 (기구조령사양장) 꾸불꾸불 새재길 양장 같은 길

瘦馬凌兢步步僵 (수마능긍보보강) 지친 말 부들부들 쓰러질듯 오르네

爲報行人莫相怨 (위보행인막상원) 길가는 이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게

欲登處立望吾鄕 (욕등처립망오향) 고개 마루 올라서 고향 보러 함 일세

 

서거정(四佳亭 徐居正1420~1488)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뤘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뤘다.

 

 

 조령 산신각

약수 위쪽에 있는 작은 산신각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되지 않은때 조정에서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

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 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었다

그대로 조정에 보고 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군사 100인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으며 이후 새재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산행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계절이 바뀌면 다시 찾아올만한 곳이다

 

 

산신각아래 조령약수

이약수는 1708년 조령성을 쌓을때에 발견했다고 전해오는 것이니 내력이 만만치 않다

사철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않는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수많은 길손들에 달고 시원한 물을 제공했을까

 

 

6.5키로 문경새재길을 걷고

고사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

이길도 대략 2키로 정도 된다

 

 

제3관문을 나서면 넓은 터에

백두대간표지석이며

선비상이며

영남대로를 뜻하는 조형물과 정자가 있다

문경새재길을 걸었다고....

백두대간길을 걸었다고

각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진촬영이 한창이다

 

 

 

문경에서 조령고개를 넘어서면 충청도 괴산땅

괴산땅으로 내리막길 2키로

여기서는 혼자 걸었다

선비가 홀로 과거시험보러가던 기분을 만나고 싶었다

개나리봇짐을 지고 과거시험을 보러가던길

새들이 쉬어가던 길

선비가 쉬었던 곳에서

늘어지게 쉬고 나서

선비처럼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단풍나무 씨앗이 꽃처럼 붉다

 풍매화였던가

멀리멀리 날아가기 좋은 헬리콥터날개를 닮았다

 

 

 

조령에서 괴산방향의 고사리 주차장

조령산 휴양림을 이용할때에는 괴산 고사리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고사리 주차장까지 8.6키로의 과거길을 걸었다

힘들지 않은 길

모처럼 여유를 즐기며 벗들과 웃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고사리 주차장

괴산군 연풍면 수옥정길 175

 

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것 같다

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얻은 것 같다

길과 많은 여유를 나눈것 같다

길과 많은 생각을 나눈것 같다

거친산에서 기다림과 힘듬의 끝을 얻었다면

넓고 편한길에서 생각과 앎을 얻었다

아는만치 보이는 길

몰라도 알게되는 옛이야기

문경새재는 자꾸만 내안으로 들어와 채워주려 했다

그래서 편집을 하는 동안 긴 시간을 썼다

오늘 이시간의 생각과 앎이 다음에 더 많은' 탑으로 쌓여있으리라

2019.5.25. by gyeong~

 

 

문경의 먹거리

약돌한우, 약돌돼지고기라 한다

단체라 약돌돼지고기로 식사를 했다

산행뒤의 먹거리 돌이라 해도 거침없이 삼킬태세다

 

문경 한국관

이곳 식당은 문경에서 가장 많은 단체손님을 유치하는 곳인듯 규모가 컸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봉명길 5                

마성면 남호리 420-1

운영시간 안내

매일 09:00 ~ 21:00

연락처-054-572-5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