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미륵산행을 마치고
국보급 석탑이 있는 미륵사지를 둘러볼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전생에도 보살이었나보다
산이 좋아서 산으로 돌아다니보니 풍경좋은 절집을 만나고
가끔씩 두손모아 기도를 해보기도 한다
익산의 미륵산에 가는가보다 했는데
궁궐터처럼 넓은 미륵사지를 만나니 건물은 없지만 터만 보아도 흥했던 백제의 불교를 짐작할수가 있다
석탑 하나만으로도....작은 동자승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게 불자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미륵사지를 만났으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면서 미륵사지에 대해서 좀더 이해를 해보고자 한다
이곳에는 국보급 석탑과 보물에 해다당하는 당간지주와 금동향로 그리고 중요문화재가 출토되었다고 하니
궁금함이 더해져서 많은 관심이 간다
허허로운 넓은 들판이지만
많은 건물이 있었나보다
유적들의 안내도를 보니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미륵산아래 미륵사지 대표문화재 국보급 석탑과 당간지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제국의 대궐터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웅장했었으리 짐작이 되는 터이다
익산 미륵사지 益山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백제 최대 가람, 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초입의 미륵사지 연못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益山彌勒寺址幢竿支柱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
---|---|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36호 |
건립시기 | 통일신라 |
성격 | 깃대기둥, 당간지주 |
유형 | 유적 |
크기 | 높이 각각 3.95m |
면적 | 2기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
보물 제236호. 2기(基). 높이 각각 3.95m. 미륵사지 남쪽에는 현재 2기의 당간지주가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양쪽 지주는 크기가 같고 양식이나 조성수법도 같으므로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는 50㎝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주를 받치던 기단부는 현재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의 부재가 파묻히고 약간만이 드러나 있으나 원형은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은 장방형으로서 여러 돌을 결구(結構)하여 면석(面石)을 이루었는데, 측면 하부에는 1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사방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정상면에 각형(角形)과 원호(圓弧), 각형의 3단받침을 조각하여 두 지주를 받고 있는데, 당간을 받치고 있던 대석(臺石)이 그 중앙에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므로 형태를 알 수 없다. 지주는 파손이 없고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내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으나 양 외측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外緣線)을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선대(線帶)를 새겼다. 앞뒷면에도 양단을 따라 선대를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나 중앙에는 선대가 없다. 주두(柱頭)는 내측면 정상에서 외면으로 호선(弧線)을 그리며 경사졌는데 중간쯤에서 1단의 굴곡을 이루었다. 간주(杆柱)를 고정시키는 간(杆)은 세 곳에 마련하였는데 내면 맨 꼭대기의 중앙부에 정방형의 간구(杆溝)가 있으며, 그 하면으로 내려오면서 방형의 간공(杆孔)이 두 군데 설치되었다. 두 지주는 꼭대기 부분에 원호의 장식이 있으므로 하부보다 상부가 줄어든 것같이 보이나 실제는 크게 차이가 없다. 기단 속에 묻혀지는 하단부는 넓이와 두께가 줄어들었으며 아무런 조식이 없이 다듬었다. 이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그 형태도 아름답고 화려하다. 가늘고 긴 호형주두(弧形柱頭)에 굴곡을 마련하고 각 측면에 선대를 새겼는데, 이러한 수법은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와 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에서도 볼 수 있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
백제시대 유적이려니 했는데 통일신라시대 유적지라고 한다
여행은 산교육이며 얻음이 많아서 좋다
석탑과 당간지주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불교 사찰에서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쓰이는, 한 쌍의 돌로 된 구조물이다
당(幢)을 거는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며 세우기 위해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이다.
대개는 사찰 입구에 세워진다. 재질은 금동등의 금속재도 있지만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다.
설치방법은 먼저 두 기둥을 적당한 간격으로 양쪽에 세운 뒤 그 안쪽 아래에다 당간을 설치하기 위한 기본시설인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놓은 다음
당간지주 안쪽에 간공(竿孔)을 뚫는다. 간공은 둥근 것. 네모진 것 등이 있으며 구멍의 개수도 1개이거나 2개인 것이 있다.
당간지주에 새겨진 무늬나 장식은 시대에 따른 변화가 별로 없고 단지 선문(線紋)이나 돌대(突帶)를 장식하는 정도이지만
기단부의 안상(眼象)이라든가 전체적인 선의 굴곡은 미술적으로 우수한 것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속하는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및 숙수사 당간지주,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와 고려시대의 것인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 선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와 같은 커다란 규모의 당간지주는 만들어지 않았고 대체로 낮고 작은 것만이 세워졌을 뿐이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이면서 아울러 그곳이 신성한 사찰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본다면
선사시대의 솟대 신앙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당간은 찰간(刹竿). 장간(長竿). 범간(梵竿). 치간(幟竿)이라고도 부르며,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에 보면 33범천을 나타내기 위해서 각 마디를 33개로 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간의 대체적인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는데, 갑사(甲寺) 철당간(鐵幢竿), 청주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 등이 대표적이다.
익산미륵사지석탑 益山彌勒寺址石塔
유형 | 국보 제11호 |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경내 |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 서쪽 절터에 있으며, 국보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석탑의 시원형식으로 불리며, 한국 석탑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보수한 이후, 1999년 국가문화재위원회가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했다.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 정비를 시작해, 18년만인 2019년 3월 정비가 완료되었고 4월 30일 공식적으로 준공되었다.
국보 제11호. 높이 14.2m. 미륵사 절터의 서쪽에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이 석탑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기록이나 석탑의 양식적 특징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낮고 작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각 층의 탑신은 각 면이 3칸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분명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탱주를 새겼으며 각 면의 중앙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는 십자로 교차되는 점에 탑을 지탱하는 석조의 찰주가 세워져 있다.
각 층의 옥개는 얇고 넓은 편으로 중앙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옥개석은 3단받침으로 되어 있다.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옥개부분도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어 전반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붕괴되어 있는 6층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임시적으로 시멘트로 보수했다.
이후 1999년 4월 국가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했다.
이에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라북도는 해체 보수 정비를 위해 가서덧집 공정을 완료했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보수정비를 시작했다.
본래 이 탑은 7층 또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4년 12월 동탑의 복원 과정에서 미륵사지 석탑이 본래 9층이었음을 밝혀주는 부자재가 발견되었다.
복원은 본래 2007년 완료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양 최대의 석탑이며 국내 최고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해체 과정이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동시에 백제의 건축기술과 관련된 학술연구가 진행되면서 작업 일정이 지연되었다.
2009년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이며,
사찰 건립 시기는 639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리봉영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후 18년만인 2019년 3월 5일 공사용 가설덧집을 벗고 보수작업이 완료되었다.
수리과정에서 기존 석재를 포함한 부재 1천627개를 조립했으며, 준공된 상태에서는 높이 14.5m, 폭 12.5m, 무게 약 1천830t이다.
층수는 9층과 6층의 논란 끝에 기존 탑의 자취에 따라 6층으로 준공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특징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의 ‘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적심시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석재를 올리기 위한 임시구조로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녹로(轆轤)와 유사한 거중기 시설이었음이 밝혀져 탑 건립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미륵사지 동탑
익산 미륵사지 동탑 복원
1993년 복원, 높이 27.67m, 기단 12.4m,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이 미륵사지 동탑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목탑지가 아니라 석탑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1980년대부터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노반 덥개석, 노반석 등 각층 부재의 출토로 탑의 높이가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복원되었다. 예산 부족으로 기계를 이용해서 깎았기 때문에 탑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들었으나,
최근에 이끼가 좀 끼고 연륜이 쌓이면서 이제는 제법 탑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하였다.
미륵사지 동탑(왼쪽)과 서탑(오른쪽)
문화재복원중
흩어져 있는 석재들~
언젠가 모두 제모습으로 복원이 되면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찾을수 있으리라
넓은 절터에 고고하게 서있는 소나무 한그루~
가까이 가봤더니
그 옆에는 석재 물통이 자리하고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소형 대형 물통
이 석재 물통은 복원하면서 요즘것으로 가져다 놓은듯하다
오래된 노승처럼 홀로 절터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
세월이 지나서 허리굽은 노승의 혼이라 들어 있는듯하다
절터 규모만으로도 대단한 왕실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곳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거닐만했다는 느낌이 전해지는 곳이다
미륵사지서탑 복원중 출토된 사리장엄구 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이처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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