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전에 다녀온후 고향길처럼 아련하게 그리운곳
언제쯤 다시 갈수 있을까
마음의 기원같은 길
늘상 함께 다니는 산우님이 사월초파일을 맞아서 그길을 가자고 한다
지리산 칠암자길이란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사, 삼불암, 약수암, 실상사까지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길인데 도솔암은 비탐로라서 사월초파일만 열어주는 길이다
체력이 힘들것 같아서 도솔암은 제외하고 나름 금대산 자락의 금대암을 차량을 올랐다가
다시 영원사로 이동하여 칠암자길을 걷게 되었다
금요일밤 10시쯤 인천을 출발하여 금대봉아래 금대암 입구 공터에서 비박을 했다
새벽6시 기상을 하여 이른 아침을 먹고 금대암에 들러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나무와
지리산의 주능선을 한눈에 감상한후 칠암자길 영원사로 이동하였다
지리산 칠암자길
2020.5.30.토.날씨- 맑음
금대암(차량으로 들렸음)-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암-약수암-실상사
13키로
실상사로 하산후 택시로 영원사까지 이동 차량 회수-35000원
파란산악회 비박팀과함께 -5명
치리산 칠암자 산행후 옥정호에서 비박 -
5.31.일-국사봉 산행후 귀경
금대봉 아래 금대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로 1035-528
구(지번) 주소마천면 가흥리 17-3 (지번)
전화055-962-5500
함양 금대암 전나무(咸陽 金臺庵 전나무)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전나무이다.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전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침엽수로 추위에 대한 내한성이 강해 전국 어디에서나 자란다.
잎은 길이 4㎝정도의 침모양이고, 꽃은 4월 하순에 피며, 열매는 원통형으로 위를 향하면서 10월초에 익는다.
금대암의 전나무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산맥을 잇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금대암 입구에 두 그루가 서있다.
나무의 나이는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큰 나무의 높이가 40m, 둘레가 2.92m로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크다.
탁영 김일손이 쓴 기행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행호조사(行乎祖師:1403년)가 다시 세운 금대암에는
오래 된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현재의 전나무 두 그루도 당시의 나무로 추측된다.
금대암은 신라 태종 무열왕3년(656)에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서 금대사(金臺寺) 라고도 한다.
1950년 6.25 전란때 소실된 뒤 금대암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어 중건되었다.
금대암은 신라 도선국사가 참배지로 인정했으며, 고려 보조국사 서산대사가 수도 성취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경내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금대사3층석탑』과
문화재 자료인 금대암 동종(제268호), 금대암신중탱화(제269호),
그리고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인 금대암 전나무가 있다. 조선조 탁영 김일손(金馹孫)이 쓴 기행문(1489년 4월 16일)의 기록에 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산사를 찾으니 20여명의 스님이 정진도량 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뇌계 유효인 선생의 시(詩)중에 '잘있느냐 금대절아 송하문(松下門)이 옛날같구나,
송풍(松風)에 맑은 꿈 깨어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려' 라는 시가 남겨져 있는 고찰이다.
노고단에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 중봉 대원사까지 종주를 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여기 금대암에서 내려가서 영원사부터 걷게 될 칠암자길은 저 능선을 하루종일 바라보며 걷게 되는 길이다
양정마을에서 부터 여기까지 3키로
걸어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승용차가 여기까지 들어올수 있다
칠암자길 가장 마지막 암자인 실상사로 하산을 한후 실상사에서 택시로 영원사까지 이동
*택시비 35000원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
오늘 걷게 될 칠암자길 중에 첫번째 암자
원래 도솔암부터 걸어야겠지만 도상거리가 길어서 영원사부터 걷기로 했다
1971년도에 복원한 사찰이라서 7암자중에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의 고승이었던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영원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설화에 의하면 영원조사는 원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의 곁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토굴을 짓고 10년 동안 정진(精進)하여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흑 구렁이로 변한 스승의 업신(業身)을 제도한 뒤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다가 한 부부를 만났다.
그는 부부에게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7년 뒤에 나에게 데려다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토굴로 돌아와서 7년 동안 절을 지어 영원사를 완성하였다.
찾아온 동자를 제자로 삼아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이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뒤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도(悟道)하여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었던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영관(靈觀)을 비롯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가 12년을 수도하였고,
청매(靑梅)·사명(四溟)·지안(志安)·상언(常彦)·포광(包光) 등 당대의 고승 109명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조실안록(祖室安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순반란사건 때 완전히 소실된 뒤 1971년에 중건되어 현재에는 인법당만이 있다.
문화재로는 영암당탑(靈巖堂塔)·설파당탑(雪坡堂塔)·중봉당탑(中峰堂塔)·청계당탑(淸溪堂塔)·벽허당탑(碧虛堂塔)·청매탑(靑梅塔) 등 부도 6기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행사가 금지되었다
다행히 윤사월이 있어서 한달 후 맞이하게 되는 석탄일
오늘 걷게 되는 모든 암자들이 오색 연등으로 환하게 맞이하고 있다
금방 무너져 내릴것만 같은 황토집
바로옆 노거수와 함게 영원사의 역사가 될 것이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까지는 1.8키로
계속 오르막길이라서 힘든 길이다
이구간만 오르면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라서 어려움이 없는 길이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까지 가는 길 중간쯤 큰 소나와 넓은 바위가 있는 고갯마루
땀을 식히며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 반야봉
하트모양의 봉우리
반야봉은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수 있다
아니온듯 다녀가소서....
그래도 잊지못하고 다시 찾게 되는 칠암자길
드디어 보이는 상무주암
삼정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상무주암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남자화장실이 있지만 오랫만에 왔더니 작은 해우소를 만들어두었다
여기 해우소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
아마도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해우소가 아닐까
상무주암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약간의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하고 일체의 바깥 인연을 끊고 내관(內觀)에만 힘썼다. 이 때 보조국사는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가운데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고 하는 글귀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1200년에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수선사(修禪寺)를 만들었다.
보조국사의 대오 이후 이 절은 성지화 되어 많은 승려들의 수행처가 되었으나 역사는 뚜렷이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는 인법당(因法堂)만이 있으며, 절 왼편에는 작고 불완전한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고려 말의 고승인 각운(覺雲)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다.
각운이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통 속에 떨어졌다는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서광을 발하였다고 한다.
석가탄신일라 이 높은 산자락의 상무주암 불단에도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사진을 못찍게 하는 사찰이라서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다
상무주암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
오늘은 날씨는 맑으나 시계가 좋지 않아서 지리산 능선이 뿌옇게 보여서 아쉽다
문수암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
상무주암에서 1키로 가량 떨어진 문수암
문수암 앞마당에 작은 텃밭이 있다
문수암은 커다란 바위 아래 터를 잡은 암자다.
순례길의 풍경을 말할 때 최고로 꼽는 이들이 많은 절집이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여명이 숨었다고 전해지는 천인굴과 늘 마르지 않는 석간수로 알려졌다.
문수암은 오랫동안 암자를 지키던 도봉 스님의 보시로 유명한 절집이다.
암자를 찾는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먹거리를 나누곤 했다.
한데 도봉 스님이 암자를 내려간 이후로 절집은 적막한 공간이 됐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신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장 풍경이 좋아서 마냥 머물고 싶은 문수암을 뒤로 하고
1키로 가량 떨어진 삼불사로 부지런히 발걸음 옮겼다
오지의 산골길 소나무들도 등기대어 쉬어가는 길
조릿대가 무성한 길을 따라 20분쯤 걸어오니 다시 삼불사가 기다리고 있다
산골집같은 삼불암
해우소도 있고
창고같은 요사채도 몇개 있다
몇년전 감주를 해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한사발씩 퍼주던 여스님이 생각난다
문수암에도 삼불사에도 스님이 안보인다 연세가 들어서 다들 산아래로 내려가신것인지
문수암에서 1km 가량 가면 삼불사이다.
상무주암에서 문수암 가는 길처럼 온통 돌산이다.
삼불주라고도 한다. 삼불사 역시 전망이 탁 트인 절경을 자랑한다.
문수암 삼불사 모두 좋은 전망에 작은 텃밭 터가 있을 정도의 평평한 공간을 가진, 암자로 손색이 없다.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들 위해 불보살님들이 점지해 주셨는지
이 넓은 지리산에서 스님들은 어떻게 이런 아란야를 찾았을까 궁금했다.
공덕비도 그대로 이고 오색등이 석탄일을 반기는 것도 여전한데
차를 내어주던 비구니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뿌옇기는 하지만 절집마당에 들어설때마다 지리산 주능선이 풍경을 내어준다
잡초무성한 산골짝 작은 절집
오랫동안 이길을 지나는 산우들에게 쉼터이고 벗이 되어 주리라
약수암으로 가는 길
7년전보다 길이 많이 좋아졌다
삼불암에서 약수암 가는 길이 이정표가 없어서 길을 잘못드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으로 닦아낸 길이 훤하게 이정표 역활을 해준다
삼불사에서 약수암까지 대략 2키로
소나무 향기가 느껴지는 힘들지않은 내리막길
새소리가 제법 많이 들리는 구간이다
약수암
약수암은 지리산 줄기의 작은 산중턱 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1724년(경종 4)에 천은스님이 처음으로 세웠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다.
1901년(광무 5)에 지월대사는 일당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1937년에는 함양의 불자 한정희의 시주금으로 중수하였으며, 1974년에 운영 비구니 스님이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과 목조 요사채가 있다. 보광전 안에는 1782년(정조 6)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약수암 아미타 목각탱
목각탱화는 불화의 내용을 부조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각기법과 불화기법이 혼용된 것이다. 이러한 목각탱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현재 문경 대승사, 상주 남장사, 예천 용문사, 서울 경국사에도 남아 있다. 약수암의 목각탱은 하단부에 "건륭사십칠년임인십일월방장산실상사"라는 기록이 있어 1782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6점의 조선후기 목각탱화 중에서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하고 있다.
비교적 작은 사각형의 목판 1매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아미타불과 8보살, 2비구가 표현되었다. 즉 화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하단 중앙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4보살과 2비구를 배치하였다.
불격에 따른 크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 반면 본존불인 아미타불만은 몸 전체를 감싸는 광배를 지니고 있다. 본존불은 사자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주위에 서 있는 8보살중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있고 손에는 보병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스님의 머리 모양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합장한 2인의 비구는 아난과 가섭으로 생각되며 그 배경에는 연꽃으로 장엄하였다.
이 목각탱화는 원만한 상들의 단순한 배치구도라든가 정교한 세부조각 등 당시 성행하던 목조불감의 불상들과 비교되는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하겠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 현판
약수암을 나서며...실상사를 향하여
경내에 텃밭이 있는데 산행하는 사람들때문에 훼손이 많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절밖으로 우회하는 길을 내었다
약수암에서 실상사 가는 길은 차가 다닐수 있을 만큼 넓은 신작로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사잇길로 질러서 내려갔다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쌍탑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실상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실상사사적기 實相寺事蹟記〉에 의하면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홍척은 도의와 함께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의 선법(禪法)을 받고
귀국하여 홍척은 실상사를 도의는 보림사를 창건하여 선종을 전국에 전파시켰는데
이를 실상산파(實相山派)라고 한다.
그의 제자 수철(秀澈)대사와 편운(片雲)대사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고 선풍을 떨쳤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팔전팔방(八殿八房)으로 대웅전·약사전·장육전·명부전·극락전 등 팔전과 만화·현묘(玄妙)·적연(寂然)·청심(淸心) 등 팔방이 있고 그외 불이문·해탈문·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종각 등의 당우가 대규모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 화재로 대가람의 전각이 모두 전소된 뒤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1681년(숙종 7) 벽암대사가 중수하고 300여 명의 승려들이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1882년(고종 19) 다시 소실되었으나 1884년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대웅전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평지이탑식(平地二塔式)이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약사전·극락전·명부전·칠성각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절에는 많은 중요문화재가 있는데 백장암3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동서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보물 제41호)·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보물 제421호) 등이다.
보물 제35호. 높이 5m.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실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증각대사(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가 선문9산 중 실상산파를 열면서 창건했다.
석등은 화사석(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등불을 밝히는 돌)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8장의 꽃잎을 얕게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화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져 있고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8각의 보개, 연꽃봉오리모양의 보주 등 화려한 무늬를 새겨 장식성이 잘 드러난다. 석등 옆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리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각 부분에 새긴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실상사를 나서며
인천에서 너무 먼거리의 칠암자길
마음은 수없이 그길을 걸었어도 혼자떠나기엔 엄두가 나지 않던길
한없이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길을 가고 싶어하는 벗이 있어서 함께 걸었더니 힘이 들지않고 즐겁게 걸었던 길이다
도상거리가 멀면 급하게 걸어가기 마련인데
산길 중간중간에 암자가 있어서 저절로 쉬어가게 하는 길
쉬어갈줄 아는자에게 자연은 아낌없이 풍경을 내어준다
지리산 능선을 따라 선이 주는 아름다움과 넓은 공간이 주는 여백을 느끼며 마음의 도를 이루는 길이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여느사찰과 마찬가지로 지역민들의 장터가 되어 있다
무심코 걷느라 뭐하나 팔아주지 않고 온것에 대해 미안함이 느껴진다
해탈교에서 람천을 바라보며....
늘상 걷는 길이고 늘상 오르는 산이지만
오늘은 숙제를 해낸것처럼 후련하고 뿌듯한 기분이 든다
다시 올수 있을까만은 더 이상 미련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에 오래 두는 것도 짐이요 해탈교를 건너며 마음에서 훌훌 털어버리려 한다
2020.3.30.토. by 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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