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고도
지리산 저 끝 천왕봉에는
안개 때문에 길이 가물가물하다
이 끝, 촛대봉에 서 있는 나는
발뒤꿈치를 바위에 붙이고 머뭇머뭇
길이 아니라 더는 갈 수가 없네
온천지에 구절초가 저리 웃고 있는데
뉘라서 저 꽃을 밟으며 천왕봉으로 향할거나
지리산의 등에 오른 구절초
구름처럼 흘러서 천왕봉으로 가네
가을에는 이렇게 서 있어야지
구절초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아찔한 향기에 취해서
바람도 몽롱해지는 그 날
어서 빨리 잎이 내려 길을 묻었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천왕봉으로 가는 구절초만 원 없이 놀다 가게
가을에는 지리산에 오지 말아야지
작년에 그렇게 말하고도
지금 구절초가 지나는 길의 풍경이 되어.
梁該憬
2014.8.30. 지리산 촛대봉에서
오전 10시-오후6시까지, 8시간
거림-천팔교-세석대피소-촛대봉(1703m)-청학연못-거림
대략13km
지리산을 다녀올 때마다
부르트는 발 때문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곱지 않은 모양새를 한 발을 쓰다듬는다
그게 벌써 몇 번째이던가
이번에는 '청학연못'때문에 간다는 핑계로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들 숲에 끼여서 지리의 품에 든다
지리의 능선에서 변화무쌍한 풍경을 보았던 사람은
절대로 지리산을 버리지 못한다
걷는동안 하늘의 조화 속에 수만 가지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산이 거기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산이 좋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산에서 만나는 신령스런 풍경 때문에 혼 줄을 놓았다가 다시 가다듬는 느낌
가슴 저밑에 울컥울컥 감동이 치밀어 오른다
혼 줄을 놓는다는 것은
꿈에서 다시 깨어나는 느낌
어쩌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세포 깊숙이 새로운 피가 흐르고
숨 쉴 때마다 코에서 구절초 냄새가 흘러나올 것 같기도 하다
반쪽의 지리에서 신비스런 안개가 흐르고
다른 반대편에서는 무념한 햇살이 처연하게 내려앉는 풍경처럼
몽롱한 지리의 풍경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청학연못에서
거림으로 내려올 때 잠시 길을 잘못 들었을때...
나는 다시 지리에 오지 않을 거라고 뻔한 거짓말을 했다.
이길은 처음이다
길상사로가는 초입이다.
거림에서 세석대피소까지 6km, 쉬엄쉬엄 3시간이면 된다.
여름 끝무렵부터 비가 잦은 탓인지 계곡에는 수량이 풍부하다
마른 계곡을 타고 오르는 일이 확실히 더 힘들었는데
맑은 계곡물때문에 한결 시원한 느낌의 산길이다.
이제 얼마를 왔고
이제 얼마를 더 가야하고...
이정표를 만나면 반갑다.
인생에서 있어서는 이정표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이 산길을 걷는 것이 행복하고
산 위에 펼쳐진 구절초를 보는 일이 지금 나의 목표이고
남은 거리만 가면 행복하다
하지만 삶의 이정표에서 거리를 알 수 있다면
목표지점 이후의 절벽에 대해서 미리부터 우울해야 할지도 모른다
삶의 정상까지 거리를 모른다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천팔교....
누군가에게 촛대봉까지의 거리를 묻는다면
천팔교에서 두세시간이면 된다고
천팔교 기점으로 말할 수 있어서 좋겠다.
산죽나무가 가는 길 내내 반기고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두어 길이 유실되는 것을 피할수 있겠다.
하지만
흙길로 타박타박 오르는 것이 좋은 일인데
요즘은 오지의 산길까지 정돈이 되어 있어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 자연 그대로의 길이 그립기도 하다.
바위틈을 지나고
작은 폭포의 힘찬 물소리 때문에
발걸음이 더 힘차다.
저 뒤엉킨 나무뿌리처럼
삶이란 곧은 것은 없다
서로 엉키고 설키고
축축한 나무에 이끼가 자라는 것처럼
메마르게 살아가지 말지어다
아주 작은 마음이라도 내가 그들의 근본이 될 수 있도록
촉촉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숲은 메마르지 않아서 좋다
푸른 이끼와 인정많은 나무와
무념의 바위에서
이끼가 자라니까
세상에는 숨쉬지 않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삼천포까지 바라보라는 전망대인데
안개천국이다
오늘 지리에서 원하는 것을 다 얻는다면
지리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겠지...
오늘은 이만큼만 보고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길
이것마저 풍경이 되는 이시간
청학에서 오는 길
거림에서 오는 길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하였어도
가끔은 서로 만나고 헤어짐이 있으리라
서로 다른 희망을 품고 살더라도
그 희망의 교차점이 찾아올수도 있는 것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언젠가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일인것 같다.
오름이 완만해진다
세석대피소다..
작은돌이 많아서 '세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넓은 세석평전
이곳에 펼쳐진 구절초의 이야기
가을 지리는 구절초를 만나러 가는 길
지리의 능선에서 가는 길마다 반겨주는 구절초
어느새 가을은 밤마다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나보다.
세석대피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촛대봉으로 올라갔다
구절초를 보러 왔는데
산오이꽃이 더 화려하게 산객을 맞이했다.
제목을 바꾸어야 할까
지천에 핀 산오이꽃
무리져 핀 들꽃도 이쁘지만
가을에는 조금은 쓸쓸한 느낌으로
이렇게 한가하게 핀 꽃도 정감이 간다.
촛대봉에서 영신봉쪽을 바라보며...
바위와 어울려 핀 구절초
키 낮은 구절초
세석평전에 펼쳐진 구절초 꽃밭
날마다 산을 타고 오르는 바람이 키웠을까
지난 몇 일 비가 온후
짙에 오르는 안개가 키웠을까
바람의 빛인것도 같고
안개의 빛인것도 같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모든 소리를 삼키고 조용히 꽃이 피는 모습을 한나절만 지켜보고 싶다.
우리 언젠가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여기를 거쳐 천왕봉으로 갔었지
그때는 들국화가 피는 계절은 아니었지
능선 길에 취해서 묵묵히 길을 걸었었지
삶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느끼는 것인지
길에 핀 들꽃이 발목을 잡는다.
세석대피소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는 길
잠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봉우리를 돌아다 본다.
암석 위에 화관을 씌운 것 같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안개가 절정이다.
햐....저 천왕봉
저곳을 가야하는데
지금은 구절초가 천왕봉으로 가야 할 시간
나는 여기서 발길을 멈추고
구절초여 천왕봉을 향해 가라.
촛대봉에서 바라본 백무동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의 세석 대피소가 보이고
넓은 세석평전이 펼쳐져 있다.
세석평전의 구절초 잔치
홀로 핀 구절초도 이쁘고
가을의 전령사 국화꽃 향기가 전해져 왔다.
촛대봉 암벽 사이로 몰려오는 안개
금방 몰려왔다가 금방 사라지고...
이 오묘한 기운 때문에
지리의 능선에서 혼을 뺏앗기나보다.
구절초밭으로 몰려오는 안개
신비스럽다
여기서 날이 저물도록 머물고 싶은데
저 꽃밭을 두고 어디로 가야하나.
정말 가기 싫다.
지리산 촛대봉 아래 '청학연못'
덩굴풀이 우거져서 길을 찾기 힘들었다
찾다가 포기하고 그냥 내려가려는데
어느신이 훔쳐 왔을까
눈앞에 턱 나타난 '청학연못'
이런 감격스러움이 또 있을까
이 '청학연못'을 보려고 밤잠을 못자고 달려왔는데
못보고 가려나...포기를 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꿈결처럼 청학연못이 나타났다
나의 간절함은 가끔 이렇게 통하기도 한다.
이 높은 고지에
마르지 않는 수심1m가량의 연못
가장 넓은 폭이 18m 가량 된다고 한다.
여기에 단풍까지 들면 정말 환장하겠다
단풍이 들었을때 또 올 수 있을까
그 소원을 신은 또 들어줄까.
일명 '떡바위'라고 하는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았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는 사이
날이 저물어 온다
산중의 어둠은 빨리 찾아온다기에....
맑은 연못에 갑자기 안개가 덮친다
스산하게 느껴지는 저녁느낌..
서둘러 길을 내려가야겠다.
(지리산의 야생화)
용담
|
며느리밥풀꽃
|
구절초 |
수리취꽃(떡취꽃)
|
투구꽃
|
산오이꽃
|
송이풀
|
지리고들빼기
|
|
미역취꽃 |
|
|
봄도 아니고 가을에
이렇게 지리의 꽃향기에 취하고 오다니
그리 야단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게
세석평전에 수를 놓은 구절초와 산오이꽃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청학연못'을 다녀오다니....
올 가을에는 아무래도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되겠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었으니
무엇인들 아니될까
길은 언제나 행복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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