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4.9.27. 강릉바우길11구간(신사임당길)

kyeong~ 2014. 10. 4. 16:10

2014.9.27.강릉 바우길 11구간(신사임당길)

바우길11구간

거리 단축을 위해서 원래의 시작점에서 걷지 않고

사임당로 육교위에서 시작하였다.

시간을 절약하여

11구간의 유적지 오죽헌과 선교장, 허난설헌 생가를 시간을 가지고 둘러보리라.

 

 

출발점 주소

사임당로 육교위

강원 강릉시 유천동 산 122-1

 

 

 

육교에서 바라본 사임당로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바우길

낮기온은 아직도 더운지라...

그늘이 짙은 오솔길이 반겨주니 좋다.

 

 

마음대로 파고드는 햇살을 받아

마음대로 편히 자란 솔숲길..

 

바우길 이정표를 따라 한동안 걸어야겠지

 

 

죽헌저수지

저수지옆 팬션 하얀집...

호숫가 하얀집을 짓고....한번쯤 꿈꾸던 집이다.

 

 

이 산속에 커피집이 있다

구름속의 산책이라는.....

 

이 아늑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구름속에 든것 같이 포근하리라.

 

 

11구간에 대한 설명을 나무판에 적어 두었는데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중구난방으로 쓴 글씨 때문이리라..

좀...정갈한 안내판이 좋겠다

길손에게 눈에 잘 들어오는 표지판이

그 순기능을 잘 하는 것이므로.

 

 

추석이 지난후라..

벼가 익어가는 길

 

벼반 피반...

이거 추수하면 쌀밥일까요 피밥일까요

 

 

이렇게 싯누런 들판을 오랫만에 본다

바둑판처럼 정리되지 않은 산골의 계단식 논...

강원도의 논이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벼의 물결

고향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다.

 

 

산초가 익어가고..

 

 

다시 만난 솔숲길

가을 야생화가 곱다.

 

 

강원도는 논도 구불구불

길도 구불구불

마을도 구불구불....

하늘도 구불구불인가.....ㅎㅎ

 

죽헌저수지를 한바퀴 돌아 산속에 내려다 보고..

 

 

오죽...

바우길 11구간 안내표지판에 나왔던 그 대숲이다.

 

 

김장배추와 다알리아가 대조를 이루는 산골 농가

여기서 볼일들을 좀 보았지요.

 

 

죽서교를 지나

둑방길을 내려와서 육교아래를 통과하면

오죽헌 뒷쪽이 나온다

담을 타고...오죽헌 정문을 찾아가는 길

감이 주렁주렁...오죽헌의 가을은 담을 타고 감이 익어가는 계절

 

 

오죽헌烏竹軒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죽헌동)

보물 제165호(1963.01.21 지정)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 관련하여 유명해진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됐다.

이 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 하였던 벼루(용연)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소장각이다.

 한편 율곡기념관은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매창·옥산 이우 등, 율곡 일가의 유품 전시관이다.

한편 강릉시는 196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10월 25, 26일 율곡을 추모하는 율곡제전을 봉행하고 있다.

 

 

5000원권 지폐의 모델이 된 풍경이다.

모르고 지나칠뻔 했는데 포토죤이 있어서 그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보는 재미를 느꼈다.

 

바우길11구간은 강원도 산간의 논의 모습과 강릉의 대표적인 유적지를 경류할수 있어서

꼭 추천해보고 싶은 코스이다.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 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오죽헌 앞뜰에서는 농악놀이가 한창이다.

가을이라...농악놀이가 더욱 풍요롭게 느껴진다

 

 

강릉농악(江陵農樂)

강릉농악(江陵農樂)은 태백산맥 동쪽 지역인 영동 농악의 대표 격으로

 1985년 1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된 농악을 말한다.
강릉농악은 ‘농사풀이 농악’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농경 생활을 흉내내어 재현하는 농사풀이가 있기 때문이다.

 

 

「강릉관노가면극」

「강릉관노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구한말까지 강릉부에 속했던 관노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매년 단오 때마다 관노들이 놀이판에 직접 참가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언극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강릉관노가면극」은

조선시대의 다른 가면극처럼 풍자가 혹독하지 않고 춤과 동작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를 통한 화해와 사랑,

시시딱딱이를 통한 벽사의식, 장자마리의 풍요추구 등 성황신제 계통극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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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강릉관노가면극을 마당에서 하고 있엇다

처음부터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해학적이라 관람객들의 웃음을 사는 가면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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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오죽헌의 세부내용은 별도로 편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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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5호.

오죽헌으로부터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주위가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러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가옥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며, 멀리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집터를 잡은 후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1815)을 비롯하여

활래정(活來亭:1816), 동·서별당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6·25전쟁 이후 일부 건물이 유실되었으나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가묘·행랑채를 비롯하여 정자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의 활래정

행랑채 바깥 마당에는 넓은 방지(方池)를 파고,

못가에 정자인 활래정을 세웠다.

방지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가산 (假山)을 만들어 노송을 심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일부를 누마루로 만듦으로써

마치 물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주변의 풍경과 함께 선조들의 뛰어난 조형미와 조원(造園)기법을 엿볼 수 있다.

(그외 내용은 별도편집)

 

 

강릉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도

김시습기념관이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도로명:강릉시 운정길 85
지번:강릉시 운정동 288-1
연락처:033-644-4600
 
 

 

매월당(梅月堂) 유필(遺筆) 시(詩) 


一鉢卽生涯(일발즉생애)                     바랑 하나에 생애를 걸고
隨緣度歲華(수연도세화)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요
笠重吳天雪(입중오천설)   삿갓은 오직 하늘의 눈(雪)으로 무겁고
是山皆有寺(시산개유사)          이 산 어디에나 절이 있을 터이니
何處不爲家(하처부위가)               어디인들 내 집이 아니겠느냐
他年訪禪室(타년방선실)        다른 해에 선실(禪室)을 찾을 때에
寧禪路岐사(영선로기사)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탓하겠느냐


 

 
 

 

 

김시습金時習

 1435년 한성출생~1493년 홍성에서 사망

요약 조선 초기의 문인.
현실비판의 비유가 번득이는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던

그는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길로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전국을 두루 돌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고 그 경험들이 창작의 원료가 되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비판은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백성에 기초한 왕도정치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되었다. 벼슬도 하지 않고 평생을 은둔과 방랑으로 살다가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김시습

 

김시습

김시습 영정, 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 소장

금오신화

〈금오신화〉, 김시습 지음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동생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무반 계통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나아가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색인 : 생육신).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저(遺著)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 梅月堂集〉·〈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실 김시습기념관은 공사중이라 내부를 잘 둘러보지못하고

자료를 찾아 편집했다.

 

 

강릉김씨한림공파종회

강릉은 '강릉최씨'와 '강릉김씨'가 주류를 이루는데

여긴 강릉김씨의 종회인가보다..

 

강릉에 감나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가을의 색은 감나무에서 오는듯하다.

 

 

경포 생태습지이다.

 

바우길11구간은 참 다이나믹하다

한적한 시골길에 저수지...

그리고 우리나라 내노라하는 유명 관광지를 거쳐 경포 생태습지에서

작은 조각배를 타는 것...

먼길을 걸어서 이런 재미를 느껴보긴 처음이다.

 

 

습지에는 빅토리아연이 가득하다

누가 올라타도 괜찮을 만큼 넓은 잎이다

 

 

노를 젓지 않고 줄을 잡아 당기며 호수를 건너는 재미가 아주 솔솔하다.

 

 

연밭

 

경포호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다.

 

 

 

 

백로도 트랙킹중? ㅎㅎㅎ

 

 

홍길동을 표현한 난설헌교

이 다리를 건너면 허난설헌의 생가로 가게 된다.

 

 

허난설헌의 생가로 가는 길의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2]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도 잘 그렸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 이조참판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명나라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오랫만에 보는 맨드라미꽃이다

증편떡에 올려지던 꽃

옛꽃과 오랫만에 떠올리는 허난설헌....

마치 유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허균許筠

 

 

1569(선조 2)~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뛰어난 집안이어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蘭雪軒)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2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명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 鶴山樵談〉·〈성소부부고 惺所覆藁〉 등

일부만이 남아 전한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문인으로서 그는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등은 그가 지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서는 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남다른 삶의 모습과 사상을 기술했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유명한 허균의 영정이다.

이곳이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이지만

허난설헌의 생가로 명한것은

아마도 허균이  참수형을 당한 자이기때문이라...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마을 이름이 초당인것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인'초당'에서 따온 것이다.

 

 

아침일찍 서울을 떠나 바우길을 걷고나니

솔숲사이로 해가 뉘엿뉘엿넘억나다.

이제 배도 출출한듯하여

여행의 끝은 맛집...

가제미정식이 유명한 식당으로 이동하여  맛있는 식사를 할 것이다.

2015. 9.27.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