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5.4.25.토. 서산 아라메길1-1구간(마애삼존불-개심사)

kyeong~ 2015. 5. 15. 01:04

 

 

 

 

 

 

 

 

2015.4.25.토요일

고풍저수지-강댕이 미륵불-쥐바위-인바위-용현계곡-서산마애삼존불-보원사지-전망대-일란산중턱에서 다시 -개심사

천천히 4시간

 

 

황산가든앞 주차장
041-663-0044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0번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16

 

인천에서 1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

이른시간에 도착을 했다.

 

이른시간

봄이 익어가는 길을 따라

용현계곡으로 발길을 옮겼다.

 

용현계곡 초입에서 만난 강댕이 미륵불

 

이 미륵불은 강댕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의 전(前) 군장동 안, 현(現) 고풍저수지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이 저수지로 수몰되게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법의을 입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 하며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 이었다고 한다.

 

 

 

용현계곡으로 가는 길

서산출생 이생진 시인의 시비가 반겨준다.

 

 

이른아침이라 용현계곡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다

이런아침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시간이다.

 

 

 

이길 '아라메길'은 심심하지 않다

작은 안내판들을 읽으며 걷는재미가 솔솔하다.

쥐모양으로 생긴 강당골에

다리를 건너오던 고양이...

고양이와 쥐의 약육강식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고을이다.

 

불교가 쇠하던 시기의 이유가 맞은직한 전설이다..

 

 

인바위

용현리 쥐바를 조금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벼랑처럼 생긴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인바위'이다.

이 인바위는 옛 골방사 건너편의 바위를  큰말(大斗)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바위에 상왕(象王)이 도장을 감추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상왕의 옥쇄는 요술 방망이와 같아서

 "금 나와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하면 은이 나오는 신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전승으로 인해 이 곳의 성주가 석공을 불러 큰 징으로 이 인바위를 깨려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운무가 모여들더니 천둥과 함께 소나기가 내리며 산천이 진동하였다.

성주는 크게 두려워, "귀신이 보호함을 알겠다." 하고 즉시 작업을 중지 시켰다고 한다.

 

 

 

 

 

 

 

 

 

 

 

마애삼존불로 가는 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용현리의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백제시대의 마애불상.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는 본존상 280㎝, 보살입상 170㎝, 반가상 166㎝이다.

중앙의 본존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보주를 든 보살입상이, 왼쪽에 반가사유상이 협시하고 있는 삼존형식이다.

7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조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본존상은 시무외·여원인의 입상으로 머리는 소발이고 얼굴은 네모나며 눈을 크게 뜨고 밝게 웃고 있다.

 당당한 체구에 법의는 통견으로 입고 있다.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머리에 일월식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천의는 양팔에 걸쳐져 U자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반가사유상도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체는 벗었고 허리 아래에만 군의를 입고 있다.

삼존상은 모두 보주형의 두광을 갖고 있다.

대좌는 3상이 모두 단판연화좌이다.

 

본존상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입상으로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얼굴은 네모나며 눈을 크게 뜨고 밝게 미소짓고 있다.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상은 머리에 일월식(日月飾)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양쪽에 화문이 있으며

높이 솟은 보관 윗부분의 중앙에는 돌기처럼 튀어나온 술장식이 있고

양쪽으로 띠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마애석불중에 미소가 가장 온화하고

손상이 가지않고 뚜렷하고 깨긋하게 보존이 되어 있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는 계단옆으로 오색연등이라 아니라

하얀 연등을 달아둔것이 이채롭다.

 

 

용현계곡을 따라

산벚꽃이 마애삼존불의 미소처럼 피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에서 보원사지쪽으로 조금더 오르면 길가에 방선암이 있다.

방선암은 조선시대 해미현내에거주하던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화창한 봄날에 학을 연상케 하는 주변의 노송과 명경수가 유유히 흐르던 천혜의 비경인 이곳

마당바위 위에서 뜻있는 문인들이 모여 시회를 열어 많은 시를 지었고

이것을 기리기 위하여 이 바위에 방선암이라 새겼다.

 
이 방선암에 새겨진 윤선좌는
1815년 12월 13일에 운산면 용장리 용못에서 출생하여 헌종 4년(1838)에
 풍기군수와 통정대부, 돈영부도정을 역임하였으며,
 
그는 호학의 지기인
 한맹유, 김진, 홍병권 등의 문사들이 세상사 온갖 풍진을 잊고 호연지기의
 높은 문학적 풍류의 철학적 담론을 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봄빛을 자랑하는 푸른 들판

이 넓은 들판에 보원사가 있었다고 한다.

보원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는 꽃이 피어

멀리서도 이보다 더 고운 계절이 있을까 싶다.

 

보원사지 普願寺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龍賢里)에 위치하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법통을 이어왔던 절의 터.

 

사적 제316호.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북위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5층석탑(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석조(보물 제102호)·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철불 1구가 이곳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 8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철불좌상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어 이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 입구에는 보원사터 발굴조사 현황과 유구현황, 그리고 유물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다.

보원사지는 지리적 위치나 부근에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 등과 관련하여 창건 시기가 백제시대가 아닐까 추정하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2006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건물지의 규모나 가람배치 양식등이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조선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기와붙이이와 자기류등 160여점도 출토 되었으나 이 역시 모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다만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여래입상 한점이 출토되었는데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백제시대 창건설의 가능성을 두고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발굴적어은 2017년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보원사지 석조 普願寺址石槽

높이 90㎝. 보물 제102호.

통일신라시대 석조(石槽)의 통식(通式)을 따른 장방형 석조로서

하나의 암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그 속을 역시 장방형으로 파내었다.

현재는 두 곳에 길이로 균열이 나 있다.

표면에 선조(線條) 등 아무 장식이 없어 오히려 장중해 보인다.

내부의 각 면에도 조식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배수공(排水孔)이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길이가 3.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인데 이렇게 큰 석조는 드문 일이다.

이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일이 있으나 이 석조를 이 때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곳 보원사지에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호)과 탑비(塔碑, 보물 제106호)·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호)·방형불대좌(方形佛臺座)·석불좌상(石佛坐像) 등이 남아 있는데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의 건립연대가 고려 경종 3년(978)이며

이 밖에 다른 석조물들도 모두 이 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조성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석조의 조성시기 역시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 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 )

(보물 제103호)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이다. 서산 보원사터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는 4.2m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쪽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양각하였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내려오면서 꼭대기 부분을 둥글게 깎았는데,

이런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위아래에 각각 있고 높직하게 조성되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작품이다.

‘당간’이란 사찰에서 불교의식을 할 때 부처의 성덕을 나타내고,

불전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내걸던 ‘당’이라는 이름의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한다.

‘당간지주’는 이 당간이 쓰러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당간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이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측면모습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사이에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보원사오층석탑으로 건너가는 길의 돌다리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팔부중”
팔부신중’ 혹은 ‘천룡팔부신중’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종류의 신장을 일컫는 말이다.

인도의 여덟 신을 불교가 받아들여 호법신으로 삼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팔부중은 대개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이나 자세도 여러 가지이다.

주로 불탑이나 승탑의 기단부에 많이 조각되어 있다.  

 

 

 

 

 

오층석탑에서 바라본 풍경

 

 

 

발굴중인 절터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와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은 보승탑비와 함께 금당지 후편에 나란히 서 있는 팔각원당식의 부도이다.

기단부가 땅속에 묻혔던 것을 1962년도에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8각형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상,중,하대로 구성하였으며, 하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양각하였다.

그 위 중대석 괴임돌에는 눈, 코, 입, 비늘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용을 구름과 연꽃사이에 조각했다.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은 다음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 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 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는데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시대의 대사찰 이였다는 서산의 보원사
일단은 넓은 면적의 초원...여기에 보원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보원사지에는 보원사지 석조, 오층석탑, 당간지주, 법인국사보승탑 등 문화재들도 많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거대했을 규모의 백제의 대사찰은 남아있지 않지만 절터의 흔적이나 

수많은 유물들은 지금도 계속 발굴이 되고 있다고 한다.
과거 보원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 전체가 거대한 불교 특구였음을 알려주는 시대사,

불교사의 중요한 문화유적인 서산 보원사지
백제시대 화려하고 웅장했던 불교문화를 한눈에 보는 듯한 느낌이다.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넓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내포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의 교역로와도 연관이 있을것 같다.

 

개심사로 향하는 산비탈에서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큰 절 보원사터를 바라보았다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마음의 극락을 얻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보원사터를 등지고 개심사로 향했다

야트막한 산길

장승이 반겨주고 있다.

 

 

철쭉이 소박하게 피었다 지는 길

지금부터는 그늘길이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을 따라 1km쯤 오르면 개심사와 전망대 갈림길에 쉼터가 있다.

산벚꽃이 쉼터에 꽃수를 놓고 있다.

 

 

 

 

 

 

 

꽃이 올려다보는 푸른 하늘을

쉬는 동안 나도 올려다 보았다

오랫만에 황사가 걷힌 봄하늘을 본다

도심의 뿌연 하늘을 벗어난 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

 

 

전망대와 일림산쪽으로 다시 걸어본다.

 

 

아라메길

아라메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가'가 합쳐진 말이며

서산시에서는 2015년까지 6년간 서산에 17개코스 239km의 아라메길을 조성할 예정이라는데

제주올레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에 이어 우리나라의 또 다른 트래킹 명소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아라메길 1구간은 유기방가옥에서 해미읍성까지 20.1km의 구간인데

약 6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며 국보급 유적지와 휴양림 그리고 산행이 포함되어 있다.

도시를 벗어나 마음과 신체를 향상시켜주는 국보급 길이다.

 

이번은 고풍저수지에서 개심사구간까지만 걷지만

다음에 단단한 마음으로 20킬로미터를 한번에 걸을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내포문화란?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맥으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언급되어있다.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은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등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내포지역을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군)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내포지역은 충청도 지역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 저수지와 어우러진 서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저수지

아마도...신창저수같은데...

 

 

 

 

 

산복숭아꽃이 곱게도 피었다.

전망대옆 낮은 무덤가...

 

 

일락산으로 가는 어느 산줄기겠지

쉬면서 나무 사이로 바라보는 산줄기들...

걷고 싶은 충동이 늘 일렁거린다.

 

 

 

 

 

일락산 중턱에서

저기가 옥양봉인가...

 

일락산 중턱에서 일란산행을 포기하고

가던길을 다시 돌아와서

개심사로 향하는 길, 버섯 쉼터이다.

 

 

 

너무 어리지도 않고

너무 자라지도 않은 연둣빛

잎파리 하나 따서 혀끝에 대어보니 풀내가 난다

 

인적이 드문길

길인지 아닌지....

길처럼 생긴 길을 따라...

 

통나무계단이 숲속길을 따라 나있고

 

 

숯가마터도 나오고...

이곳쯤에 예전에 사람이 많이 살았나보다.

 

 

돌무더기와 돌담같은 것이 있는데 암자터라고 한다

 

 

 

성왕산, 개심사 뒷길를 따라 걸어내려 갔다.

 

청벚꽃이 핀다는 사월의 개심사다

세번째 찾는 개심사

그때는 청벚꽃이 피는지도 몰랐는데

청벚꽃때문에 일락산 일락사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중도에 개심사를 향하여 찾아 들었다.

 

 

연등과 꽃의 절정을 맞이하는 사월의 개심사

어디서들 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좁은 절간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소박했던 개심사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절집처럼 느껴지는다

개심사와 개심사 청벚꽃은 별도로 편집하여 사찰이야기편에 정리하여 올려 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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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과 오월은

어딜가도 가장 아름다운 연두빛과 꽃들의 잔치가 이루지고 있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생기도록 걸어보는 길

그 길에는 지나간 역사와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와

앞으로 다가올 기다림의 기쁨이 어우러지고 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길

알아서 정든 길

변화무쌍한 길을 적어나가는 일

내삶의 기쁨이 될줄을 몰랐다

지금 밤1시 10분....

내일 출근을 위해 자야겠지만

이렇게 지나온 길을 적어가다가 새벽을 맞이한 일이 몇번이던가

이나이에 밤새워 무엇인가 적고 읽고 볼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2015.4.25.토.아라메길1-1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