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6.2.6.토. 남한산성길

kyeong~ 2016. 2. 6. 01:00

 

 

 

 

 

 

 

 

 

같은 길, 다른 상념

 

 

좋은 사람은 만날수록 좋고

좋은 곳은 지난날을 잊어야 새롭다

남한산성길은 수어장대가 있고, 4개의 문이 있고

성곽을 따라 바깥쪽 길과 안쪽 길이 있다는 둥

같은 길, 아는 만큼 보이는 길을 기억한다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그 길이

알았던 것까지 잊은 길이 된 어느 날

병자년의 겨울처럼 길은 얼어붙고

인조의 굴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잘것없는 지식이었음이 부끄럽다

 

인생은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슬프다

멋모르고 걸었던 길이

인조의 굴욕의 길이고,

황진이의 설법으로 영혼을 던진 어느 기생 

죽어도 알지 못할 그 사람에 대해

나는 지금 잊어도 될 슬픔을 괜히 알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괜히 슬픈 길

추억까지 잊고, 또다시 드는 날은

두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梁該憬

2016.2.6. 성남 남한산성 둘레길에서

 

 

 

 

 

설밑의 주말, 멀리가기에는 대명절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마음만 분주하지 집에 있다고 딱히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다.

몹시도 바쁜 2,3월의 일정을 두고 집에서 쉬기에는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리하여,

자동차로 한시간여의 거리에 위치한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서울근교의 남한산성은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부담없이 걸을수 있고 시간대별 코스를 조절 할 수 있어서

수도권시민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조상들이 나라를 지기키위한 성쯤으로 여기며

북한산성길에 비해 걷기좋은 성곽길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다.

 

역사적 의미와 깊이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은 몇 번을 걸은뒤에야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으니 다른사람들도 그랬을것이라는 짐작을 한다.

 

북한산성은 인조의 한과 굴욕이 서린 곳이다.

병자호란때 인조는 강화도 행성으로 갈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남한산성 행궁에 47일간 머물며 항전하다가 1639년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여 

송파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린 뒤 무릎을 끓고 항복하는 치욕적인 굴요글 당해야 했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른다.

 

이 때 청나라와의 댓가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우힐 요정)을 청나라에 볼모로 내어주었다. 이곳에 굴욕적인 삼전도비를 세웠다.

한나라의 임금이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피를 흘릴때 한시대를 같이했던 부하들과 백성들의 눈물또한 피눈물이었으리라

그래서 남한산성을 걸을때에는 나라의 존엄성과 눈물에 대해 조금더 생각하며 걷는 것이 이렇게 깊어가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인것 같다.

다음에 걸을때에는 혼자 걸으며 한걸음 한걸음의 인조의 걸음으로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흑백으로 다시한번 안내도를 찍어서 남긴다.

체력이 강한자는 저기 그려진 성곽길을 한번에 걸을 수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스별로 나누어 걷는다

무작정 걸어서 완주하는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이 길은 안내판 설명을 읽고 바라보며 생각을 남기고 바람까지도 느끼며 걷는 것이 좋다.

 

 

 

 

남한산성

주장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南漢山城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

산성

유형

유적

크기

둘레 약 8㎞

면적

528,460㎡

별칭

주장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문화재 지정 (지정일)

사적 제57호, 세계문화유산 (1963년 1월 21일(사적 지정), 2014년 6월 22일(세계문화유산 지정))

건립시기

통일신라시대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원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2016.2.6.토요일

오전 8시출발-12시 30분도착

남문주차장-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동장대터-장경사신지옹성-장경사-송암정터-동문-탑공원-중앙주차장

 

 

남문주차장

8시

남한산성 둘레길 걷기출발

보통 산성역이나 마천역에서 1시간여 청량산길을 따라 오르지만

오늘은 산성내의 남문주차장에서 출발을 하여 걷기 쉬운날이다.

 

 

 

남문주차장에서 수어장대 쪽으로 오르는 샛길

새집....겨울새가 없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나는 겨울새가 되어 날아왔는데.....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성곽길

남한산성길을 성안쪽 길을 걷는 방법과

성 바깥쪽 길중....선택하여 걸을 수 있는데

성외벽길은 호젓하여 조용히 생각에 잠겨 걷기는 좋으나 겨울에는 미끄러운 편이고

성내벽길은 문화재와 사잇길을 즐기며 걸을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성곽에서 바라보는 풍경

청량산 아래로 위례신도시가 펼쳐져 있다.

 

중간중간 11개의 암문이 있어서 마음먹기에 따라

외벽길을 넘나들수 있다.

겨울이라...사람들이 거의 걷지 않는 외벽길..

 

 

 

수어장대(守禦將臺)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1972.05.04 지정)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산성 서편의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이며,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고,

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의 12만 대군과 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무망루 보호각

무망루는 국력이 약해 인조가 겪은 시련과

 심양에 8년간 볼모로 잡혀갔다가  

왕이 된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수어장대내의 매바위

남한산성 축성때 구간 책임자였던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

이때 이 바위 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멀리 사라졌다.

그의 예언대로였다.

남편의 소식을 듣고 공사비를 마련해 한강을 건너던 부인과 첩은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투신자살했다.

한이 서린 바위다. '守御西臺(수어서대)'란 암각글씨가 새겨져있다.

인조2년 성을 쌓을 때 단층으로 지은 장대의 이름은 '서대(西臺)'였는데 영조때 2층으로 다시 지으면서 '수어장대'라 하였다니,

이 암각글씨는 최소 영조 이전의 흔적일 것이다.  

 

 

 

청량당淸涼堂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합각지붕 건물이다.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이회(李晦)는 조선(朝鮮)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 송씨와 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무죄가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을 지어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ㆍ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이후 새로 만든 것이다.

예로부터 정월 초이튿날에 제를 올리는데, 그날이면 성 안팎의 부녀자들이 소원성취의 치성을 드리는 풍습이 전한다.

 

 

청량산과 남한산에 이어져 있는 남한산성

산이 들고나는 생김새대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걷는다

성의 흐름에 마음을 두고 걷다보면 언제 올랐었고 언제 내려갔는지 ...

 

사는게 그렇다

일이라는 옹성을 따라 살다보면

언제 힘들었는지

언제 기뻤는지도 모르게 살았고

한동안 살다보니 그 벽과 같은 일의 옹성은 사라지고  망망한 대해에 놓였으나 갈 곳이 막막한 날을 본다.

 

 

한겨울 해가 뜨기전 잠이 덜깬 몸을 이끌고

성곽길에 다달았고...

아침의 볕은 성곽길에 비추는데

그땐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이제사 사진에서 볕을 만나고

사람은 늘....살아오던 그길에 볕이 있었는지 느끼지 못하고

지난날을 뒤돌아가...그때가 볕이 만발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연주봉 옹성

 

이곳은 서울의 북한산까지 바라다 보이는 조망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는 야간 별궤적 사진을 찍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송림이 도열하는 길을 따라 다시 또 걷는 길

 

몇번을 와보아도 추억을 잊고 걷는다

추억이 사탕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땐 그 망각이 기쁠때도 있다.

 

왔었지만 잊어버린 추억

그 망각한 추억앞에서 새로운 만남으로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서문

우익문이라고 하는 서문

서문은 삼전도와의 거리가 가장 짧아서 인조가 청군에 굴복하러 갈 때 나섰던 문으로

아픈 역사가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걷노라면

하늘로 가는 길

하늘끝에서 궁궐을 만날 것 같은 길이다.

마루금.....하늘금길이다.

 

복잡한 도시

사람이 지천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을 두고 먼 하늘 길로 갈 것같은 착각에 빠지는 곳이다.

 

 

 

도시를 벗어나

손잡고 가는 길

성곽의 경계가 도시와 행복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길이다.

가끔은 경계가 있어서 좋은 날이다.

 

 

 

 

잠시 암문을 빠져 나가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본다.

 

저기 도시에서 살아왔지만

난 딴 곳에서 살고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이곳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차이'라는 것이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경계를 만들기도 한다.

 

동장대터에서 봉암성문을 빠져 나가면

남한산과 벌봉으로 가는 길이다.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길

허물어져 가는 그길

옛날이 사라져가는 길

가끔은 잊고 사는 것이 행운이고 그 잊음으로 인해 다시 찾아온 길이

또다시 새롭고 즐겁지만

저렇게 허물어져가는 과거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쉬운 맘이 클 수밖에 없다.

 

 

남한산성 성곽길 중에 복원이 미루어진체로 그대로인 길

난 벌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일행들은 벌봉을 포기하고 동문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외성인 봉암성이 훤히 내다보이는 동장대터

 

다음에 남한산성 걷기를 한다면

벌봉으로 가는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예전에 걸었지만 잊어버린 과거를 찾는 것처럼 걷고 싶다.

 

벌봉의 유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한양 주변의 산세를 파악하도록 용골대 장수로 하여금 주변 산세의 지도를 정확히 그려올 것을 명령하였다

이후 청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찬찬히 살펴 본 후

 조선의 임금이 피신을 하게 되면 남한산성으로 가게 될 것을 알았으나 문제는 남한산의 기운이었다.

엄청나게 강한 힘을 가진 산에 산성이 있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을 한다면 전쟁에 이길 수 없음을 감지한 청태종은

그 기운이 없애기 위해 기운의 중심인 벌봉을 파괴하도록 병사들에게 지시를 하였다.

벌봉에 화약을 설치하고 폭발을 하여 산의 기운을 약화시킨 후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후 그 사실을 인조가 알고 병자호란 전에 산성 밖에 있던 벌봉을 산성을 안으로 들이게 하는 공사를 하여

지금은 벌봉이 남한 산성 안에 있게 되었다. ‘사후약방문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기운이 약화되어 있는 것도 그러 하지만 어떤 술책? 주술? 비책? 을 써놓았는지(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음)

갇힌 기운은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장수처럼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출처 : 기치유와 명상

 

동장대터

휀스를 치고 옛것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구역이다.

 

동장대는 봉암성으로 가는 암문 바로 옆에 있다.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었다.

동장대는 1624년 인조 2년에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붕장대와 동장대은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땜문으로 추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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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

허물어진 이 곳이 언젠가 복원이 되고 그때는 이 색깔과 모습을 잊을지도 모르기에

과거를 귀한 시간을 보존하듯이 지금을 담아둔다.

 

 

 

 

장경사신지옹성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둘레가 159m이다.

 

 

 

제2암문을 빠져 나가면 ...장경사신지옹성이 있다.

 

 

제2암문을 빠져나와 바라 본 장경사신지옹성

 

 

역사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지난 가을도 역사의 시간속에 왔다 갔고

무수한 나뭇있도 왔다같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수히 지나간....시간들

 

 

 

다시 암문을 빠져나와 성내벽길을 따라 걸어가는 길

 

 

언제나 빠짐없이 찍어보는 사진

뒤돌아 걸어온 길을 찍어보는 것이다.

장경사신지옹성길을 따라 내려온 길을 찍어보았다.

내려올때는 가파른 길이라 급하게 걷지못했지만

뒤돌아보면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시간이다.

 

 

 

저 길을 넘어가면 장경사

 

 

장경사長慶寺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축성 당시 나라에서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를 번갈아 징집하여 사역(使役)을 돕게 하였는데,

각성은 1638년(인조 16)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계획하였을 때에는 이 절에 총섭을 두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내의 8개 사찰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지휘하는 국방사찰(國防寺刹)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 뒤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북한산성과 함께 이 남한산성에도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로 교체하면서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승병들의 국방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동향한 정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요사채 등이 있다.

 

 

사찰을 좋아하지만 일부러 외면을 했다.

사찰의 모든 것이 궁금한 나는

만약 저곳을 들른다면 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때로는 무심한 것이 다른 것을 얻을 수있다는 귀한 진리를 알기때문이다

 

한번의 만남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하지 말라

어차피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므로 성인이 되기 힘들다

인간의 모자란 점이 다시 또 수행이거나 반복이거나...

기회를 얻을 수있다는 느린 진리를 갖고 살라.

 

 

장경사 넓은 주차장 앞에는 남산산성이 둘러쳐져 있고

한쪽에 암문의 일번지 '제1암문'이 있다.

 

 

 

마른 잎 사이로 정오를 향하는 겨울태양이 눈부시게 들어오고 있다.

 

 

 

머물수 없는 시간처럼

우리의 발걸음도 머물지 못하고 다시 또 타박타박 길을 떠난다.

 

 

 

산비탈을 따라 난 길인지도 모르고 걸었지만 어느곳에서 뒤돌보니

산중턱을 따라 성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우린 그져 안일하게 걸었던 것이다.

 

 

전망대처럼 휘어진 성곽

장경사 포루이다.

 

소나무와의 만남이 운명인것처럼 어울림이 좋다.

 

 

 

장경사 포루

 

그래서 저 곳에 아니 올라 볼 수 없지

동문쪽을 바라볼 수 있는 멋진 곳이다.

 

 

길 건너 남문으로 가는 성벽길이 보이는 길

 

 

 

검단산을 배경으로

지난 해를 살다간 잡초들

 

 

 

저아래 골짜기를 내려서면 동문이 있고 산성리 마을이다.

동문을 지나 342번 국도를 건너면 검단산에 걸쳐져 있는 남한산성길인 다시 제1,2,3옹성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진다.

 

 

 

장경사를 지나 산성길을 따라 걷다보면 고사목 한 그루 쓸쓸히 서있는 곳이 있다.

 

 

◎ 황진이와 송암정

남한산성 동문 근처 가파른 절벽의 바위 위에 마치 일산(日傘)을 펼쳐놓은 것과 같은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을 송암정이라 불렀다. 이곳에는 옛날 황진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황진이는 개성의 이름 높은 기생으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삼절이라 불리었다.

황진이가 서화담의 명성을 듣고 그를 희롱하고자 일부러 소학을 가지고 가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면서 서화담을 희롱하였으나, 서화담은 추호도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태연 하였다.

 

 이에 황진이는 서화담의 높은 학문과 성품의 고결함에 감동하는 한편,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옛날 지족대사와 같은 고승도 여색을 참아내지 못하였는데,

서화담 선생은 큰 성인이다.”라고 탄복을 하고는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여승이 되었다.

 몇 년간을 금강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황진이는 어느 날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이곳 송암정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이 송암정에는 남녀 여러 명이 모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놀고 있었다.

그들은 곁을 지나 가는 여승 황진이를 보고는 일부러 붙잡고 희롱하기 시작하였다.

강제로 손을 잡고 자신들이 놀고 있던 곳으로 끌고 가서 “술을 따르라.”, “같이 놀아보자.”등의 말을 하며 놀려댔다.

 진이는 처음에는 묵묵히 참으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희롱이 점점 심해지자 마침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어,

자신이 황진이 임을 밝히고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가를 꾸짖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황진이의 말에 모여 있던 한량과 기생들은 할 말을 잊고 부끄러워하였다.

특히 한 기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기생은 “소녀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 이 세상을 살기가 부끄러워졌사옵니다.

녕히들 계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송암정에는 달 밝고 고요한 밤이면,

 남녀가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윽고 그것이 통곡하는 소리로 변하여 들리곤 한다고 한다.

현재 송암정에는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던 소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나무가 고사하여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고사한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신비스런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이 바위위에 서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부르는 소나무이다.

 

 

송암정터

고사목하나 뻘쯤히 서 있는 이곳이 황진이와의 인연이 거쳐간 곳이란걸 몰랐다.

무심히 지나 온 이곳 다음에 이곳을 걷는다면 다시 한번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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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문화유산

비록 복원 구간이 많아서 과거의 것보다는 지금의 흔적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유산이 많은 나라일수록 역사가 깊은 곳

역사의 긴 시간여행 속을 거닐며 세상에는 이유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이루어진 역사의 의미를 되돌려보면

과거는 힘과 지혜가 역사를 지켰고

 지금은 경제와 자본이 역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복원중인 동문과 산성

 

동문(좌익문,左翼門)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때 보수하였고, 인조2년(163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 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 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복원하기전의 동문(퍼옴)

 

 

 

동문을 내려서면 342번 국도가 성곽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남문으로 가는 성곽길을 오르지 않고

탑공원으로 타박타박 걸어간다

아스팔트길이라 조금은 부담이 되지만 오늘의 일정 종착지인 탑공원으로 향한다.

 

 

이름처럼 진입로부터 석탑이 즐비하다.

 

 

창덕궁 후원에서 보았던 모양의 행운의 문도 있고....

아~ 올해는 모든이에게 행운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흔히 보았던 돌탑이 모여있다

이 엉성한 돌탑을 보러 온것이 아니라

약간은 야설스런 석상이 있어서 재미삼아 찾아 오는 것이다.

 

 

사유지를 이용해 20여 년간 골동품 1만2천여 점과 400여 개의 탑을 쌓아 ‘탑공원’을 조성한 이기건씨(76).

전국을 돌며 모은 돌을 공을 들여 하나하나 쌓은 탑공원은 남한산성 중턱에 자리한 숨겨진 명소로 등산객에겐 입소문이 퍼져있다. 


관광객들이 꿈과 목표를 담아 쌓은 돌 조각 하나하나가 모인만큼 의미도 깊다. 종류도 다양하다.

입구부터 양쪽으로 다양한 형태의 돌 작품들이 수 천개가 훌쩍 넘을 정도. 길 양쪽 1.5㎞구간에 줄지어 도열해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석동과 돌탑, 돌하루방, 12지신상에 미풍양속을 담은 돌조각에서부터 동물 석상까지 각양각색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이씨가 정성을 쏟은 데 반해 행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의 제재를 받기도 했고,

어렵게 조성한 조각품들이 관광객의 무분별한 관람태도로 훼손된 적도 있다고.

이씨는 “자연스럽게 서 있는 돌탑과 돌조각들이 상쾌한 남한산성 공기를 마시며 산행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추억을 선사하는 광주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라며 “절차상의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기일보 2015.11.5일자 신문 발췌)

 

남성의 상징물이 있어서 호기심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은데

관람객들이 남성의 상징물을 파손하여 흉물처럼 서있는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호기심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인생과 재산을 투자하여 만들어가는 꿈의 공원을 가벼운 마음으로 훼손시키는 일은

타인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절대 그런일은 없어야겠다.

예전에는 그외 여러가지 남성의 상징물을 조각한 석상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철거를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낙엽을 건너가는 돌다리같이...

 

 

 

아랫길은 돌탑공으로 걸어갔던 일방통행로 342번국도

윗길은 돌탑공원에서 동문으로 가는 일방통행로

 

 

동문에서 중앙공원까지 대략 500미터쯤 걸어간다.

멀리까지 걸어도 좋은 산길에 비해

짧아도 아스팔트길은 정말정말 노노노~

 

 

 

중앙주차장으로 가는 길

남한산성벽화가 괜히 반갑다

안다는 것은 반가움의 지수를 나타낸다

얼만큼 아느냐에 따라 반가움도 그만큼도 크니까 말이다.

 

 

남한산성 중앙주차장에 위치한 두부만드는집

 

 

남한산성맛집 "두부만드는집"

주소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229

전화 : 031-749- 7780

 

산길에서 내려와 아~ 뭘 먹지 싶을때

담백한 맛집, 그래도 한번 맛을 봤던 이집이 그래도 기억나지 않을까.

 

 

 

역사의 시간여행과 맛있는 식사후

이제 차를 타고 돌아가는 시간

언뜻 동상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공 신익희 동상 

신익희는 광주 출신의 큰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초대 국회의장, 대한민국 건립 당시 정치인이다.

1956년 대통령 입후보하여 호남지방에서 유세 중 별세하였다.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초월읍 서하리에 보존되고 있다. 남한산성 내 중앙주차장에는 선생의 동상이 건립돼 있다.

 

거대한 세계문화유산안에

남한산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의 동상이라.....

갑자기 지역 이기심이 앞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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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지 못했지만

남한산성 동문에는 시구문이 있다.

궁금하여 검색을 하였고 인천경기신문에 실려있는 글을 옮겨보았다.↓

 

시신 옮기는 문, 남한산성 시구문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좌익문 일대를 둘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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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 남한산성의 동문. 축대위에 문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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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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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식 축대 남한산성은 동편의 낮은 곳에 축성을 했기 때문에 성의 문루를 오르는 길도 계단식으로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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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 동문의 출입구. 현재는 동문은 보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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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아픔을 지닌 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일대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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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짝 성문의 문짝은 외부를 철판으로 덧입힌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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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안 성벽 여장에 마련된 총안을 통해 내다 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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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 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했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했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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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동문루 위에서 바라다 본 남한산성 성곽. 우측에 깊게 보이는 부분 아래 수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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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암문 동문의 인근에 마련한 동암문. 제11암문인 동암문은 남한산성의 암문 중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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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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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구문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한다.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을 통해 버려졌기 때문이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