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 路

2016.4.23.정족산(전등사) 둘레길

kyeong~ 2016. 4. 23. 00:21

 

 

이번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며 잠을 잤다

일어나자마자 하늘부터 확인했다

고향 친구들과 처음으로 산에 가는 날이다

이 친구들은 모두 온순하게 살던 친구들이라 산에 가는 것을 엄두를 못냈다

내가 늘 다른 사람들과 산행을 하다보니 친구들과 무심했던 반성을 해보며

올해는 친구들과 좀더 자주 만나려고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김포 서울 용인 ...그리고 인천에 사는 나

각기 다른 곳에 살다보니 모여서 산에 가는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다행이 차량을 모두다 소지하고 있어서 김포친구네에 모여서 멀지 않은 강화 정족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장 멀리 있는 용인친구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오손도손 시시콜콜.....온갖 이야기와 웃음을 나누며 전등사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내고 동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산성길을 따라 올랐다

그늘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모두 땡볕이다

그래도....덥지않은 날씨덕에 천천히 걸어올랐다.

 

 

 

 

 

 

 

강화 정족산(鼎足山) 삼랑성(三郞城) 성곽둘레길 안내도

정족산(鼎足山) 삼랑성(三郞城) 성곽둘레길 5.0km

(2016.4.23. 토....중학교 동창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정족산(鼎足山) 정족산성(鼎足山城)을 한 바퀴 돌아 강화만을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는 길을 걷는다 

산행코스 : 동문에서 남문까지 성곽따라 한바퀴-전등사-정족산성사고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성곽길을 따라 오른다

 

 

시작부터 급경사이지만 그리 높지 않아 누구나 오르기 쉬운 코스이다

계단과 길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운동화만 신으면 오를수 있는 길이다.

돌은 막돌을 사용했으며 여장대신 시멘트로 발라두었는데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좀 정성을 들여서 옛모습을 살려서 복원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5분정도 오르면 왕따나무 한그루가 강화를 바라보고 서있다.

복원된 성곽길이지만 옛정취를 느낄수 있는 강화의 숨결이 묻어나는 길이다.

 

 

 

맑은 날씨덕에 강화시내가 맑게 보인다

산에 올라 발아래 풍경를 바라보는 맛, 그맛에 산에 오르는 것이다.

 

 

축대위를 따라 걷노라면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바람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올라오느라 흐르는 땀을 금방 식혀주는 것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이길을 걷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위을 걷노라니

어릴적 신작로 흙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다

숲이 없어서 좀 그렇지만 아직은 더운 날씨가 아니라 다행이다.

 

 

저 봉우리가 정족산 정상이다

220미터 정도의 산이라 동문에서 출발하여 30여분 정도면 정상에 닿는다

 

 

정족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부근)

정족산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산이다.

정족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강화도에서 가장 큰 사찰인 전등사와 정족산성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특히 정족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가 남아있어 유적답사 및 가족산행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산행은 전등사에서 시작된다. 전등사의 요사채 뒤로 난 길을 곧바로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정상에서는 나무에 둘러싸인 전등사의 고풍스러운 모습과 마니산과 서해바다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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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상부근....

멀리 강화쌀의 생산지 정돈이 잘 된 강화전답을 바라볼수 있는 곳이다.

 

건너편 마니산이 뿌옇게 보인다

황사가 없었으면 바다까지 보였을텐데...

봄은 이렇게 풍경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곳의 성곽은 돌의 크기가 크고 여장도 올려놓았고 동문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성의있고 정돈이 잘 된것같다.

 

 

 

북문쪽으로 내려가는 길

동문과 북문은 공사중이다

아무래도 복원을 다시하고 있는듯하다.

 

이곳을 내려가 북문쪽 솔밭에서

친구들이 가지고 온 먹거리와 막걸리 몇사발 들이키며

시간가는줄 모르게 수다를 늘어놓앗다

 

 

한시간여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또 성곽길을 따라 오른다

올랐다 내려갔다....업다운이 있지만 걷는데 무리는 없는 길이다.

길가에 쑥도 피었고 남녁에는 이미 지고 없는 진다래도 드문드문 피어 있다.

 

 

 

이길은 한마디로 신작로다

확트인 시야와 황톳길

시골길을 친구와 도란도란 걷는 길이다.

 

 

산을 가장 못탈것 같은 공주같은 친구가 가장 앞서간다

몸이 가벼워서인지 처음이지만 수월하게 앞서간다.

 

 

 

길도 이쁘고 친구도 이쁘고

이야기도 이쁘고 사는것도 이쁘고

 

 

정족산성, 鼎足山城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으로,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라 칭해질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정족산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아우른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둘레는 2.3㎞ 정도로, 성곽은 산정상부에서 남문쪽 해발 75m 정도의 능선까지 내려와 있다.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이 각각 제시되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치성(雉城)

치성(雉城)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돌출되어 성벽을 견고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가 취약한 곳을 보완하도록 축조된 방어 시설물이다.

치(雉)는 꿩으로서 능히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뜻을 따서 치성이라고 하였다

만약 적이 쳐들어와 성벽에 붙어 기어 오르거나 성벽을 허물려고 하면 치성에서 총이나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한것이다.

 

 

정족산성길은 여장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의 성곽은 비교적 돌이 크고 여장이 있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

맞은 편 동문에서 올랐던 성곽길이 보인다

 

한바퀴 더 돌았으면 좋겠다는 느낌의 탁트인 길

산길이지만 고향길을 걷는듯한 황톳길

역사의 길을 사월의 날 좋은 휴일을 빌어 자알 걸었다.

 

 

남문에서 동문까지 마져 걷지 않고 전등사로 향한다.

죽림다원앞...윤장대

 

윤장대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재현한 것으로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자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하는데

돌릴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죽림다원

 

 

전등사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길 대명루를 통과하여 전등사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꽃인듯 별인듯

절집마당에 둥둥 떠있는 연등

석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앞마당에는 소박한 화분으로 장식해두었다.

아기부처님도 마당나와 있고 ......아....벌써 석탄일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연등하나 올려야겠다.

 

 

 

 

꽃밭에 나와있는 아기 부처

 

 

대웅보전내에 부처님

열린문으로 살짝 보인다

그저 마음으로 관세음 보살을 외며 ......

 

친구들과 같이 온터라 법당에 들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

꽃길이다

하늘에는 연등이

길에는 이렇게 황매가 가득하다

 

 

꽃숲에 놓여있는 소원기왔장도 담아보고...

 

 

정족산성 사고로 가는 길

 

 

정족사고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되었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때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족산사고의 내부 모습

 

 

정족산 사고앞 멋쟁이 소나무

올때마다...항상 멋진 소나무

 

 

민들레꽃밭

 

 

 

 

정족산사고 풍경

 

 

 

 

 

 

 

 

 

 

 

전등사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