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하면 동백꽃
그리고 윤선도가 생각나는 고장이다
ㄱ격자봉을 걷는 동안 아직 철이 일러 동백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빼곡한 동백숲을 보며 동백을 본듯 가히 짐작을 할 수 있다
보길도에 오면 윤선도에 대애 좀더 알고 갈 수 있는 유적지가 많다
곡수당과 동천석실 그리고 세연정이다.
격자봉을 내려와 윤선도의 유적지를 순서대로 하나씩 탐방해보기로 했다.
보길도 격자봉과 수리봉을 거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곡수당
문이 없는 고택 돌담이 세월을 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곡수당 매화 #1
아 올들어 가장 먼저 만나는 매화다
곡수당 뒷뜰의 매화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 않게 뒷뜰에 보일듯 보이지않을듯 피어 있다.
곡수당 매화 #2
곡수당 매화 #3
곡수당 뒷뜰의 담
산에서 내려오면 저기를 통하여 곡수당에 들어서게 된다
찾는 인적이 많은지 잡초가 무성한 마당에 길이 나있다.
곡수당
윤선도가 기거했던 낙서재 건너에 지어진 윤선도의 아들 학관의 휴식공간이다.
학관은 윤선도의 첩인 경주 설씨의 소생으로 서자이지만 윤선도는 학관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고 한다.
곡수당과 사당
왼쪽 곡수당과 오른쪽 사당
곡수당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다리가 3개 있다.
학관은 아버지인 윤선도에게 하루 3번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문안 인사를 갈 때마다 다른 다리를 건너서 갔다고 한다.
사당
고산 윤선도가 낙서재에서 세상을 뜬 후 해남의 금쇄동 묘소로 이장하기 전까지 모셔두었던 곳이다.
곡수당 뜰에서 바라본 사당
곡수당앞 하연지
곡수당에는 2개의 연못이 있다 상연지는 곡수당과 사당사이에
하연지는 곡수당앞 낙서재로 가는 길에 있다.
하연지 안내판
곡수당옆 상연지
높이가 한길(보통 사람키) 정도의 방대 위에 가산을 만들고 허리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끌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 연못으로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이 하였다.
곡수당 뜰에서 바라본 낙서재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에 육지로 가는 배를 서둘러 타기로 한 바람에
낙서재와 동천석실 탐방은 생략하고 멀리서 사진만 남긴다.
낙서재
낙서재는 보길도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로 고산 윤서도가 돌아가실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이곳은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소요하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조그마한 세 채의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곡수당을 벗어나며서 바라보았던 풍경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윤선도의 고택....
여유와 참선을 느끼게한 풍경
보길도...섬이 유배시켜버린 윤선도 그속에서 그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현세인이지만
그를 알고자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고자 했다.
섬에는 바람이 많다
그래서 섬에는 돌을 버리지 않고 방풍역활을 할수 있게끔 담을 쌓았다.
보길도에는 황칠나무가 동백 다음으로 많다.
마을마다 밭마다 황칠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담안에 자라고 있는 오래된 황칠나무
2월의 보길도
동백이 피기에는 때가 이른가보다
겨우겨우 몇송이 찾아서 찍어보았다.
아침 공룡알 해변에서도 만났듯이 보길도에는 마을 한가운데 동백숲이 많다.
어딜가나 동백숲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아마 동백나무가 가장 많은 섬일 것이다.
동백이 피기는 아직은 이른 계절
그래도 숲속에서 동백꽃의 출산을 엿보고 싶다.
비가 올듯 말듯...배편시간이 다가오고
동천석실이 멀리 바라보이는데 아쉬운 마음만 가득히 ....담고...그냥 간다.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보길면) |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 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낙서재에서 세연정까지는 아스팔트길...대략 2키로를 걸어야한다
산행후 아스팔트길...그다지 반갑지는 않지만
보길도를 마음에 담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가본다.
길가에 보도블럭대신 나무데크길을 조성해 두었고 가로수가 전부다 동백이다.
나무데크가 오래되어서 삭았는지 나무판넬이 밟으면 벌떡 일어나는 것이 있어서
일행중 한사람이 큰일 날뻔했다.
길가 가로수로 심은 동백은 비교적 다른곳보다 많이 피엇다.
섬에는 바람이 많아서인지
동백이 바람이 꽃살이 뜯겨서 이쁜 봉오리를 찾기가 힘들다.
긴 아스팔트길을 끝내고...
아~ 드디어 세연정이 있는 윤선도 원림이다.
이곳을 일컬어 섬속의 낙원이라 한다.
윤선도 원림 명승 제34호
입장료는 2000원
세연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 보길도에 오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 세연정이다.
세연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리동을 만나고...
세연정으로 가는 길
올들어 가장 먼저 만나는 민들레꽃....
반갑다...민들레....
1.동대 2.서대 3.회수담 4.사투암 5.세연정 6.판석보 7.혹약암 8.비홍교 9.옥소대
보길도세연정(甫吉島洗然亭)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세연지는 자연과 인공의 미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공간으로 부용동 정원에서도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자연적인 계류를 돌둑으로 막아 연못(세연지)으로 만들고 다시 그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인공 연못(회수담)을 만든 후 두 연못 사이의 인공 섬에 정자(세연정)을 놓아
주변의 다양한 경관을 누릴 수 있게 했는데,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점점이 드러난
세연지의 자연적인 곡선미와 축대로 둘린 회수담의 인공미가 서로 대비되면서도 잘 어울린다.
회수담 안에는 네모진 섬이 하나 있으며 넓적한 바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고
또 세연정 동쪽에는 각각 동대와 서대로 불리는 네모진 단이 두 개 있다.
이 회수담 안의 너럭바위와 동·서대는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무대로 쓰였다.
연못 주변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 있고 차나무, 녹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수가 우거져 있으며
연못 안에는 여름철에서 늦가을까지 귀여운 노란 꽃이 피는 개구리연이 퍼져 있다.
원래 있던 세연정은 낡아서 무너졌으나 1993년에 옛 주춧돌 위에 새로 정자를 복원해 놓았다.
지금의 세연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단층 정자인데 사방에 마루와 창살문이 있으며
창살문 밖에 널빤지 문이 달렸다. 안에서 주변의 경관을 두루 볼 수 있고 정자 안 한가운데에
사방 2.5m의 온돌 방바닥을 깔아 정자 아래 아궁이에서 불을 때도록 되어 있다.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후 쓴 기행문 『보길도지』(甫吉島識)에는
고산이 세연정에서 지내던 모습이 이렇게 적혀 있다.“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옥소암이라 함은 세연지 남쪽 산 중턱에 올려다 보이는 흰 바위를 말한다.
이곳에 사람을 올려 보내 춤을 추게 하면서 연못에 내리비치는 그림자를 즐겼다니, 감각적인 호사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글 출처; 네이버 검색에서 발췌
* 혹약암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 사투암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 비홍교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사투암과 세연정
세연정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세연정#1
세연정과 소나무
세연정#2
세연정#3
세연정 편액
세연정#4
세연정과 회수담
세연정#5
세연정과 회수담
세연정#6
동대
어부사시사가 불려지면 여러사람이 어울려 군무를 즐겼던 곳이다.
* 판석보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판판석보
건너와서 반대편에서 다시 한번 찍고
세연정 건너편 오솔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연정
아쉬워서 걸어가면 다시 한번
가까이 당겨서....
내가 언제 여기 또 오겠어
그래서 아쉽다 아쉽다 ....뒤돌아서 다시 한번....
세연정의 동백...
보길도에는 동백이 많지만...
세연정의 윤선도의 발길을 잡게한 동백을 다시 남겨보고.
올때에는 언제나 설레이는 마음
돌아설때 또 아쉬운 마음
바다를 보며 다시 또 오리라 기약은 하지만...
해남 땅끝선착장에서 보길도까지는 1시간
노화도 산양항까지는 30분...
요즈음은 노화도 산양항까지와서 버스로 보길도까지 이동한다.
왔던데로 그대로 또다시 돌아가는 길
보길도에서 산양항으로 이동
3시배를 타고 뉴장보고호를 타고 다시 돌아간다.
아침7시에서배를 타고 오후 3시에 다시 나간다.
참 바쁘게 돌아보고 가는 길이다.
땅끝마을 선착장
보길도를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보길도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저 남녁땅에는 동백이 많으려니 했었지만
그렇게 많은 동백숲을 가지고 있을줄 몰랐다
동백의 절정을 만났을때 아마도 윤선도가 흠뻑 빠졌었나보다.
윤선도가 빛나가에 한 섬 보길도...
바쁜걸음으로 걸었지만 그래도 보길도를 만났으니 올해는 늘 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보길도와 윤선도에 대해서 다음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을 적어보고자 한다.
윤선도 원림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12km쯤 떨어진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다. 윤선도 유적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으로 고산이 직접 조성한 생활공간이자 놀이공간으로 조선 가사문학의 대표적인[어부사시사]가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고산 윤선도,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 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섬의 주봉인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귀양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무민당, 곡수당 등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르며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 세연정사적
보길도는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 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보길도 이곳 부용동은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살던 유서 깊은곳이다. 병자호란의 국치와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용동의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하여 자기구제와 초속적 자유를 얻었다. 부용동은 고산이 51세때(1637년) 들어와 85세(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13년간 살면서 7차례나 드나들었고, 어부사시사 40수와 수십편의 한시를 창작하였다. 고산의 부용동 생활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 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 세연정 지역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 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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