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조금 남는다
편백나무 숲에서 30분거리의 전주한옥마을을 돌아보던중에
만난 '경기전'
한옥마을 건물중에 더 특별하고 궁궐냄새가 나는 곳
입장권을 끊고 그 안을 미사일속도로 둘러보았다
주어진 시간이 1시간이라서 다른곳을 둘러보는것을 멈추고
경기전을 둘러보기로 했다.
길은 언제나 배움을 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또 한페이지를 눈여겨 보는 것이다
조상들의 시간을 돌아본다는 중요한 의미때문인지 발걸음 급해졌다.
경기전 慶基殿
사적 제339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누전.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유적. 1410년(태종 10)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3곳에 창건하여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고,
1442년(세종 24)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종전이라 했다.
사적 제339호이며, 정전은 보물 1578호이다.
경기전
관원으로 영(종5품) 1명, 참봉(종9품) 1명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경기전은 소진되었으나 영정은 묘향산 보현사에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1614년(광해군 6) 전라도관찰사 이경전(李慶全)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건한 것으로,
중수상량문(全重修上樑文)>이 남아 있다.
건물의 구성을 보면 본전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고, 본전 외 창고를 위시하여 여고와 실록각이라고 하는 문고가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3번째 기둥렬에 고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의 양옆에는 일산과 천개를 세웠다. 본전 앞의 헌(軒)은 본전보다 1단 낮게
쌓은 석축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 포작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의 구성은 정자각 구성과 같다.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정전(正殿) 기능과 내신문(內神門) 내 신로(神路) 및 향로(香路)의 엄격한 격식 구비,
정전과 배례청(拜禮廳)의 평면 조합과 어방(御房 : 어진을 모신 방)구조 등의 특색, 남한에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진전,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고 견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 등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8년 12월에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Daum백과]
한옥마을을 빠른걸음으로 둘러보던중 만난 경기전
전라도 땅에 경기전이라...전각의 이름이 궁금하여 기웃거리다가
여기가 태조이성계의 어진이 보관되었던 곳이라해서 한옥마을 포기하고 경기전을 돌아보기로 했다
입장료를 끊고...(신용카드도 가능)
경기전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사진
홍살문을 지나서 답도를 따라 들어서니 입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전주한옥마을의 인기가 어느정도인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해설사가 태조이성계의 어진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현존하는 유일한 어진을 모신곳이니
예를 다하여 관람하라는 안내문을 읽으니 새삼 마음을 좀더 정숙하게 한다.
답도가 있고
양옆에 쇠로된 대형 가마솥이 있는데
전각이 목조건물이라 화재에 대비해서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라 했다.
전각의 오른쪽과..
전각의 중심부를 남기고..
전각중심부 위를 올려다보니..
거북이 같기도 하고 나뭇잎같기도 한 장식물이 있는데
궁금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다.
조금더 당겨서 찍어보니..
거북이인듯하다
태조이성계의 어진
1872년/비단에 채색/220×151㎝/국보 317호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으로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진본이다.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으로,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 어진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혼란기에 큰 전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 구본이 낡아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어진박물관에 진본이 모셔져 있으며 경기전에 있는 것은 진본이 아니다.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어진 외에도
진용(眞容)·진(眞)·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어용(御容)·왕상(王像)·어영(御影) 등 다양하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 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조선 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다.
어진 오른쪽의 모습
어진 왼쪽의 모습
경기전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정사각형의 좀더 넓은 답도는
경기전에서 제례를 올릴때 필요한 공간이다
이곳을 들러보며 알게 된 새로운 이야기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
그래서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한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년) 때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며,
시조비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으로 군윤(軍尹, 향직)을 역임한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태조의 선대들은 그 본향인 전주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다가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때 전주를 떠나 삼척과 의주를 거쳐 몽고 알동으로 옮겼으며,
익조 때 토착세력의 위협을 피해 의주로 돌아와 살다가 함흥에 정착하여 도조ㆍ환조ㆍ태조에 이르기까지 함흥ㆍ영흥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목조가 전주를 떠난 것은 지방관의 갈등 때문이라고 한다.
목조는 지전주사(知全州事)가 자신이 가까이 했던 관기에게 산성별감의 숙청을 들게 하자 관기를 몰래 빼돌렸으며,
이에 지전주사와 산성별감이 자신을 처벌하려 하자 전주를 떠나 외향인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새로 부임한 안렴사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마찰을 빚었던 그 산성별감이었으며, 이에 목조는 삼척을 떠나 동북면으로 이주하였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꼼꼼히 들었으면 좋겠지만
한가하지 않아서 서둘러 다른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 쪽문으로 들어섰다
앞에 전동성당이 하늘을 찌르는데
동양과 서양의 조합처럼 보였다.
국악소리가 들려서 와보니
꽤 많은 관람객들이 듣고 있었다
걸죽한 국악 한마당 즐길 시간이 없는 전주 나들이다.
국악소리를 등뒤로 두고...시간 맞추어 기다리는 버스로 돌아섰다.
경기전앞 전동 성당
조선의 이씨의 본향이 전주라는 것과
현존하는 태조이셩계의 어진이 이곳에 있다는 것..
그래서 전주를 양반의 도시라고 했나보다
다른곳보다 격이 다른 전주비빔밥이 양반의 도시라서 그런가보다
호남각에서 맛보았던 전주 비빔밥이 끌리지만 들릴수 없음이 아쉽다.
쾌속도로 둘러본 전주한옥마을과 경기전..
새로운 앎을 얻었다는 것이 즐겁다
2018.7.7. 토 by 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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