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에서
닮은 봉우리끼리
백 년을 지내도
천 년을 지내도
저 봉우리 따로 있는데
우리는 어디서 만나
여기까지 함께 왔을까
같은 봉우리에 올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네
함께 걸어온 길
저 길이 그리 아름다웠노라.
여기에 그대와 서 있으니
탁한 도시의 봄은 잊히고
겨울을 지나온 나무처럼
내 몸 마디마디 꽃이 피네
세상의 꽃이 나무에서만 피는가
저 산 능선을 사뿐히 넘는 꽃잎이
내 마음과 그대 마음 아니던가.
梁該憬
2015.4.11.마이산 정상에서
10년도 더 전...
작은아이 손잡고 여길 왔었는데
어떻게 알고 왔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무작정 떠돌다 마음가는 곳에서 묵고
눈에 띄는 곳에서 머물다 갔었는가보다.
그때는 계단은 없었고 좁은 길을 따라 올랐고
암마이봉은 밧줄을 타고 올랐었다.
마이산의 맛집마다 지금 유행하는 등갈비가 여행자의 발길 잡았었다.
그리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날
친구와 입구에서 산채비빕밥을 먹고
빗속에서 한참이나 바라보다
돌아서...그냥가고
그 이후 북부주차장에서 남부주차장까지 은수사와 탑사를 지났고 금당사까지 트랙킹을 했었다.
마이산은
네번째 나에게 손짓을 한다
마이산이 날 짝사랑하는 것일까
손내미는 곳에 마음 가는 것이다.
네번째의 마이산행
산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걸어볼 기회다.
남부쪽 산능선에서 걷는 길이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쌍의 부부 봉우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긴 시간동안 부부봉 마이산을 길게 바라보며 걷는 행복이 있다.
완연한 봄볕아래 벚꽃이 축제를 시작하는 계절
축복받은 관객이 되어 마이산을 관람하였다.
진안 마이산(686m)
산행일자:2015.4.11. 토.
산행시간:10시~오후4시
누구와?:인천 파란산악회
산행코스:마이산남부주차장-고금당-비룡대-봉두봉-탑사-은수사-암마이봉
-은수사-탑사-탑영제-남부주차장
마이산은 두 개의 큰 산봉우리로 되어 있다. 중생대 말기인 백악기 때 지층이 갈라지면서 솟아났다고 한다. 시대별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이라 하였고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였으며,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태종이 이 산을 행차하여 보니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이름지었다 하는데,지금은 속칭으로 동쪽을 수마이산(680m), 서쪽을 암마이산(686m)이라고도 하는데, 두 봉우리가운데 암마이산이 6m정도 더 높다.
계절별로는 마이산은 세계 유일의 부부봉이며, 봄에는 돛대봉, 용각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단풍이 곱게 물들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도 쌓이지 않아 먹물에 찍은 붓끝과 같다 하여 문필봉 등으로 불렀다.
마이산 산봉과 유사한 역암으로 된 탑 모양의 봉우리들, 광대봉, 관암봉, 비룡대, 봉두봉 등 10여개 산봉들이 마이산 동남쪽 약 2㎞ 지점까지 연달아 분포하는 것이 매우 특색이 있다.
마이산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걸쳐 약 10∼20㎞의 서남방향으로 고원을 이루는 진안고원 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금강이 북류하고 섬진강이 남류하는데 강정골재(350m)에서 수계가 나누어진다. 남사면에는 지름 수㎝에서 수m에 이르는 풍화된 구멍인 타포니(taffoni)가 많이 나타나는데, 그 지름이 큰 까닭은 역암의 메트릭스(metrix: 자갈 사이의 충진물질)인 세립물질이 풍화되어 역이 빠져나감에 따라 나타난 것이다. 현재에도 남북 사면의 미기후(微氣候)의 차이에 따라서 습한 북 사면에는 식생이 번성하나 남 사면은 건조하여 식생이 빈약하다.
이 산 일대의 자연경관과 사찰들을 중심으로 1979년 10월전라북도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수마이봉 기슭의 숲속에 은수사(銀水寺)라는 절이 있고 그 밑에 또 다른 명물인 탑사(塔舍)가 있다. 또한 2003년 10월에 산태극·수태극의 중심지로서 국가지정 명승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약 100여 년 전 이갑용(李甲用)이 쌓아올린 80여 기의 돌탑인 마이산탑(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5호)으로 이루어졌는데, 불규칙한 자연석을 모아 원추형 혹은 기둥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 그 남쪽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찰 금당사(金塘寺)에는 은행나무에 조각된 금당사목불좌상(金塘寺木佛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과 14위의 관음보살상을 그린 9m 길이의 금당사괘불탱(金塘寺掛佛幀, 보물 제1266호), 금당사석탑(金塘寺石塔, 전라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122호)이 소장되어 있다.
이산묘(駬山廟)는 이성계(李成桂)가 등극 전에 임실의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 후 내려와 마이산에 들어설 때 말을 매어놓았던 자리로, 단군성조와 태조·세종·고종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懷德殿), 조선 시대 명신·거유를 모신 영모사(永慕祠), 한말의 지사(志士)와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 은수사에는 이태조가 심었다고 전하는 진안마이산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와 진안마이산줄사철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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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찰을 끼고 있으니 입장료가 당연히 있겠지...
좀 비싸다는 생각이다.
인천 부평역에서 6시30분 출발하여
마이산 남부주차장에 9시40분경 도착하여
간단한 몸풀기체조후 산행은 10시부터 출발하였다.
금당사 일주문이다
고금당 방면으로 향하는 산행 진입로이다.
갈림길에서 왼쪽 고금당방향으로 오른다
고금당(古金塘)
금당사를 지나 가파른 암벽위에 자리잡고 있는 고금당
그 아래에는 고려말의 고승이었던 나옹선사의 수도처였던 자연암굴 나옹암이 있다.
고금당은 옛날 금당사가 있던 곳이라하여 이렇게 부른다.
고금당 처마에서 바라본 마이산
고금당 바로 아래에 있는 나옹암(儺翁庵)
나옹선사는 자연암굴인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
나옹선사
1320(충숙왕 7)~ 1376(우왕 2).
고려 말의 승려. 공민왕의 왕사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이며
조선건국의 일익을 당담했던 무학대사의 스승이며
여주 신륵사에 입적하였다.
혜근(慧勤)이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懶翁和尙)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가 생각나는 고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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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화상의 석조물..
산줄기 줄기를 걸으며 바라볼 저 봉우리
저기 멀리 보이는 마이산을 향해 걸어야 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탓에 걸어가는 동안 수없이 바라보리라.
고금당에서 바라보는 비룡대
비룡대와 마이산
고금당에서 마이산 감상을 하고
다시 뒷편 우물을 지나....마이산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
힘들거나 땀이나거나 가파르더라도
조금씩 걸어가노라면 그 목적지는 반드시 내발끝에 닿아있다는 신념으로
마이산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본다.
마이산의 주변 산하를 한번씩 돌아보기도 하며..
비룡대
마이산에 오려거든 여기서 한번쯤 쉬어갈일이다
마이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진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이산 암마이봉
그리고 뒷편 숫마이봉..
비룡대에서 잠시 쉬는 동안...
꾸밈없고
아기자기하게 골짜기마다 정겨운 마을이 보인다.
삿갓봉과 마이산
오늘 일행은 저기 삿갓봉을 향하지 않고
반대편인 봉두봉으로 갈 것이다.
성황당와 봉두봉사이의 안부
몸살기로 인한 몸이 성황당은 패스하고 바로 봉두봉으로 간다.
성황당과 봉두봉 갈림길의 표지판
봉두봉에서 바라본
탑영제와 금당사.
봉두봉에서 바라본 비룡대
비룡대역시 타포니지형 위에 세워져 있다.
어느새 거대한 암마이봉이 눈앞에 와있다
금방이라도 오를수 있는 것 같은데.....
숭숭 구멍이 난 암마이봉..
타포니지형에 대해서
요약하여 아래에 설명할 것이다.
봉두봉에서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니
탑사가 있다
일행과 뒤쳐진 듯하여
멀리서 풍경만 보고...은수사를 거쳐 암마이봉으로 향한다.
남부주차장 입구에서 입장료를 냈는데
여기 또 거금 3000원 내야 하나....
아마도 북부주차장쪽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내라는 모양이다
좀 헷갈린다.
우리는 그냥 통과....아무도 제재하는 사람은 없다.
은수사(銀水寺)
은수사(銀水寺)사찰은 마이산도립공원 입구에서 출발해 2.5km을 지나면 탑사에 이른다.
이어 오른쪽 오솔길로 올라가면 숫마이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무량광전, 대적광전, 태극전, 요사채, 마이산 산신제단 등이 두루 갖춰져 있다.
조계종단 소속의 전통사찰이라고 한다.
은수사란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 따르면,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
『진안지(鎭安誌)』에는 ‘정명암(正明庵)은 금당사의 동쪽 마이산 제일봉의 아래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정명암은 은수사 태극전의 옛 이름을 말한다.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에는 국내 최대 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출토됐다.
또한 은수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마이산 줄사철군락(천연기념물 380호),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386호)가 그것이다.
뒷편에 보이는 거대한 봉우리는 숫마이봉(680m)이다.
은수사의 대웅전 "대적광전"
법고 왼쪽에 보이는 현판은 "무량광전"
국내 최대 크기의 법고가 소장되어 있는데,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언제고 법고를 두드려볼 수 있다.
법고의 지름은 1.88m, 1983년에 만들어졌다.
은수사 청실배나무
이성계가 100기도를 마치고 기념식수한 배나무
대략600년 되었다고 함
천년기념물 386호
은수사 역고드름(퍼옴)
은수사는 거꾸리고드름이 유명하다.
우뚝 솟은 암수마이봉 사이에서 급격한 공기의 대류현상이 나타나면서
공기가 위로 빨려 올라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때 그릇에 담아놓은 물이 가장자리부터 얼다가 가운데에서 공기를 따라 위로 빨려 올라가면서
계속 모세관현상이 상승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겨울에 방문하지 않은 탓에 확인은 못하였지만
혹여 겨울에 온다면 이 청실배나무 아래에서 한번쯤 기이한 현상을 눈여겨 볼 일이다.
건물안에는
이성계가 금척을 받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 할 때에,,
꿈 속에서 산신령으로 부터 금척(금으로된 자)를 받고,
이 자로 땅을 재어 보라는 말을 듣고,
그 꿈을 해몽해보니 왕이 될 꿈이였다고,
그 후에 이곳 마이산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사이의 안부에서 본
숫마이봉의 모습
은수사에서 뒷편 계단에서 바라본 암마이봉의 모습
마이산은 퇴적암중 역암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타포니지형이다.
퇴적암과 변성암 그리고 타포니지형
퇴적암은 지표면의 암석, 광물이 풍화 작용을 거쳐 생성된 퇴적물이 뭉쳐지고 다져지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변성암은 퇴적암이나 화성암이 높은 열과 압력을 받아 원래 암석의 결정이나 조직의 특성이 변한 암석이다.
역암은 자갈이 교결되어 있는 암석이다.
주로 둥근 자갈로 구성된 퇴적암이며, 작진 자갈로 구성된 각력암과 구분한다.
역암과 각력암을 이루는 입자는 2 mm 이상으로 모래보다 크다.
역암이 발달한 지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에 의해 커다란 자갈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때 이웃한 자갈들을 끌고 내려가면서 움푹한 지형을 만드는데, 이를 타포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이산에서 타포니를 발견 할 수 있다.
은수사 뒷편 삼거리 안부에서
계잔을 따라 1km정도의 가파른 계단을 따라
힘들게 오르면 숫마이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암마이봉에 이른다.
10년동안 휴식년을 지내고
다시 얼굴을 드러내는 암마이봉
10년전 이곳은
계단이 없고 줄을 타고 올랐던 곳이다.
10년의 나이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님 계단이 사람을 더 지치게 하는 것인지...모르지만
줄을타고 오르던때가 덜 힘들었던 것 같다.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산, 가을에는 마이산, 겨울에는 문필봉
지금은 꽃피는 봄
돛대봉에 왔다가네.
탑사를 등지고 있는 산이라서 그런가
산정상에도 돌탑이다.
둘러보니...돌이라곤 없는데
어디서 저 많은 돌을 찾아내었는지...
내손에 들어올 돌이 없다.
그 흔한 돌하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탑을 쌓지 못했다.
탑이란
어쩌면 남이 가질 것을 내가 갖는 것
꼭 가져야할 것이 아니라면
내안의 탑은 모두가 욕심이리라.
정상에 오르면 늘 내려가기 싫다
저기 우리가 걸어온 길 고금당과 비룡대가 보이고
그리고 어쩌다 이사람들과 여기에 서있다.
예전에 서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지만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들....
저 봉우리들은 늘 그렇게 서있지만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저 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아련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에 젖는다.
어쩌다 내곁에선 그대들이여...
늘 행복하시길!
뿐이겠는가..
우리가 걸어갈 탑영제 호수도 보인다.
정상에서 얻은 천하는 잠시...
세상 내것이 어디 있나
잠시 보고 갈 뿐이지
암마이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숫마이봉
손에 잡힐것 같지만...
화엄동굴
숫마이산 중턱에 화엄굴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마시고 정성을 다해서 지성을 드리면
옥동자를 얻을수 있다는 이야 기가 전해온다.
젊은 부부가 많이 올라야 할듯하다.
가파른 암마이봉에서 숨을 고른후
왔던 길을 따라 은수사를 향해 내려온다
절간은 뒷태조차도 사람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은수사 단청과 숫마이봉
뒤돌아본 은수사
대적광전과 숫마이봉의 풍경이 너무 크게 다가 서는 곳이다.
암마이봉과 겹쳐지는 숫마이봉
타포니 현상이 있는 곳에
누군가 글자를 새겨 두었다.
그런데...그위에 "반만철' 낙서처럼 또 새겼네.....
왜 그랬을까
이름 석자 아름다운 곳에 새겼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은수사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탑사
수많은 돌탑들
가장 뒷편 큰 돌탑이 천지탑이다.
그리 단단하지도 앟는 절벽
저 절벽틈에도 탑을 쌓았다
어떻게 올랐을까..
저 돌은 어떻게 지니고 저기로 올랐을까.
흙이 없을 법한 저 돌틈에
제법 큰나무가 홀로 자라고 있다.
구멍사이에 있어서 바람은 피할수 있겠다.
탑사에서 본 암마이봉
급하게 올라가느라 암마이봉으로 가느라
그냥 지니치듯 본곳
내려오면서 다시금 둘러보게 한다.
몇번째 오는 곳이지만 갈수록 사람이 무척이나 많이 온다는 것이다.
이갑룡거사의 사적비가 보이는 탑사
머리크기만한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 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고,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 년의 풍상 속에 태풍과 회오리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거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아라" 는 것이었다.
이거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거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분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 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 이치 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마이산 탑사 영신각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거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거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월광탑"
암마이봉의 정기를 받아 쌓아올린 탑으로 끝남을 의미한다.
일반대중과 가까이하고자하는이갑룡처사의 초기작품이다.
오른쪽이 "약사탑"
이탑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왼쪽에서 나오는 음기운이 강하여 옆으로 기울여 쌓은 탑이다.
탑사 대웅전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고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 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 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 것은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대웅전 뒷편 큰 돌탑이 천지탑이다.
마이산 은수사와 탑사에는 섬진강 발원지가 있다.
물론 여기보다 더 먼곳에도 섬진강의 발원지가 있을수 있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를 살펴보면 장수군과 진안군에 있는
장안산, 팔공산, 마이산등의 산줄기에서 섬진강이 발원하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은모래를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의 풍경을 아는 사람은
이곳 섬진강 발원지가 더욱 반갑게 다가 설 것이다.
탑사의 탑 축조자 이갑룡 처사의 존영
이갑용처사는 1860년 전북 임실에서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아 명산을 찾아서 수도하던중 신의 계시로
마이산에 들어와서 30년간 탑을 쌓고 30여권의 신서를 남기고 1957년 98세로 타계하셨다.
탑사의 탑들을 하나 하나 30년동안 손수 쌓으셨다니 그 정성이 놀랍기만 하다.
호남의 젓줄이고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섬진강의 발원지에 탑을 쌓은 것은 우연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탑들을 찾는 것은 그냥 보기에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공든탑이 무너지랴"
탑사관계자들은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의 돌멩이가 밑에는 음돌로,
위에는 양돌로 이루어져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박아둔 샛돌도 탑신에 물려 있어 탑신의 움직임에 같이 이동하면서 탑신을 잡아주고 있다"고
내부원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몇번째 왔지만
늘 일행이 있어서 조용히 사찰기행문을 쓸만큼의 여유를 얻지 못한다.
사찰에도 인연이 닿아야 그 발자취를 돌아볼 기회를 얻는 법니다.
다시한번 뒤돌아보며 오늘의 등반여정의 마무리를 위해 돌아서 간다.
일반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범종각이라 이름하지만
이 곳 탑사에서는 있는 그대로 사물각이라 이름하였다.
사물각이란 글자 그대로 불전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이제 탑사를 나가서 벚꽃이 핀 길
사월의 꽃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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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
동동주 한잔에 기분이 더욱 up이다.
인생은 어쩌면 막걸리 한잔의 맛이 아닐까
그리 깊게 취하지도 않았지만
약간은 취한듯 흔들리는 맛
그맛에 세상 사는 맛이 날런지도 모르겠다.
한잔 술이 온 몸을 휘감아 도는데
이꽃이 나를 춤추게 한다.
기분은 꽃보다 더 밝고
세상은 천국처럼 아름답다.
갑자기 유년으로 돌아가 오리배를 타고 싶다.
물위에 떠서
약간은 무서운듯 연약한 심성이 되고 싶다.
거리의 악사도 있고....
그렇지만 관객이 없네.
시간이 조금더 허락한다면
관객이 되어 줄텐데...
탑영제에서 바라본 마이산
꽃잎 흩날리는 이길에서
그대는 나비가 될텐가
꽃잎을 닮은 영혼이 될텐가
휘적휘적 바람부는데로
그냥 걷기만해도 좋은 시절
지금 이나이라서 행복하다
길을 나선다고 말릴사람도 없고
어디를 가더라도 모두간 천국같은 세상
한동안은 목표지점이 되었던 마이산
갈수록 멀어지는 마이산
올때는 좋았는데...말이다
영원한 목표도 없고
영원한 인연도 없은 것이 인생인 것이다
지금 그대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떠난다는 것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과 같은것
또 어디로 나설텐가
어디에서 그대를 만날수 있을지
기약같은 것은 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이순간을 기억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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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1. 섬진강 쪽빛 물빛을 닮아서 "쫓비산"이라던가 (0) | 2015.03.22 |
2015.3.7.토 아산 영인산(364m) (0) | 201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