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山

2015.12.19.설악산 신흥사

kyeong~ 2015. 12. 19. 00:49

 

 

 

 

신흥사新興寺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설악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이다.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라 하였으며, 당시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도 함께 지었다.

이 때 자장은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이 구층탑이 어느 탑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향성사는 698년(효소왕 7)에 능인암과 함께 불타 버린 뒤 3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701년에 의상(義湘)이 자리를 능인암터로 옮겨서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쳤다.

이 때 의상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3존불을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 동안 번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파괴되었고, 1642년(인조 20)에는 화재로 완전히 타 버렸다.

 

1644년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이 소림암(小林庵)에서 나타난 신인(神人)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3재(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고,

선정사 옛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신흥사라 하였다.

 

그 뒤 신흥사에는 수많은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1647년에는 대웅전을 건립하였고, 1661년(현종 2)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짓고 《법화경 法華經》 등의 판본을 두었으며,

1715년(숙종 41)에 설선당(說禪堂)이 불에 타 버리자 1717년에 취진(就眞)·익성(益成)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해장전을 중수하였고, 1737년에는 명부전을 창건하고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으며,

1801년(순조 1)에는 벽파(碧波)·창오(暢悟) 등이 용선전(龍船殿)을 짓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13년에는 주운(周雲) 등이 불이문(不二門)과 단속문(斷俗門)을 세웠고, 벽파 등은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였다.

 

1821년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벽하(碧河)·명성(明成) 등이 16나한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서 해장전으로 옮기고

해장전의 이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고쳤다.

그 뒤 1909년에는 용선전이 헐렸고, 1910년에는 응진전이 불탔으며, 1912년에는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설선당 후각(後閣) 32칸을 중수하였다.

1965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되어 양광·속초·강릉 등지의 사암을 관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절의 주지를 지냈던 성원(聲源)이 대소의 당우들을 거의 모두 중건 또는 중수하였고,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최근 절이름을 ‘神興寺’에서 ‘新興寺’로 고쳐 부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영산전·보제루·천왕문·일주문·불이문·적묵당(寂默堂)·설선당 등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된 보제루가 있다.

이 가운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1644년에 세운 건물로

중앙의 공포(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단청이 지극히 아름답다.

 

현재 봉안된 삼존불은 의상이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보제루는 휴정(休靜) 등 고승 60여 인의 진영(眞影)이 안치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효종이 하사한 향로와 김정희(金正喜)의 진필(眞筆)이 있다. 절 일원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43호의 향성사지삼층석탑과 청동시루·범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경판 277매(枚), 사천왕상 등이 있다.

 

청동시루는 순조의 하사품으로 벽파가 역대 왕조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것이고,

경판은 효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자·한글·범어(梵語)가 혼합되어 있는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크다.

경판의 종류로는 《은중경 恩重經》 전질과 《법화경》 일부 등이 소장되어 있다.

 

범종은 경내 보제루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종은 1400여년 전 향성사의 종이라고 전한다.

향성사가 불탈 때 깨졌던 것을 1748년에 원각(圓覺)이 개주했으나 소리가 완전하지 못하여 1758년에 홍안(弘眼)이 다시 개주하였다.

이 종의 무게는 600㎏으로 6·25전쟁 때 총상을 입은 뒤 1963년에 수리하여 보존중이다.

사천왕상은 인도산 마디가원목을 사용하여 1981년에 조성, 봉안한 것이다.

 

최근에는 1997년 10월 높이 14.6m로 세계 최대의 청동불좌상이 조성한 지 10년 만에 일주문 앞에 봉안되었다.

이 청동대불은 통일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 일명 ‘통일대불’로도 부른다.

 

부속 암자로는 선정사의 옛터에 세워진 내원암(內院庵)과

 655년에 건립한 계조암, 1785년(정조 9)에 창건한 안양암(安養庵) 등이 있다.

 

 

 

일주문

사찰의 구조물들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점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다.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숭원과 당이다.

 

일주문에 들어 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 곳을 기준으로 승(僧)과 속(俗),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생사윤회의 중생계(衆生界)와 열반적정의 불국토(佛國土)가 나누어 진다.

절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정문이며, 경내(境內)와 경외(境外)를 구분하는 문이기도 하다.

양쪽에 기둥을 하 나씩만 세워서 만든 문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절에 따라서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

이상씩 세운 것도 있으므로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 하겠다.

 

어쨌든 이 일(一)이라는 것은 불교의 진리를 나타낸 일승법(一乘法)이라고 이해하면 될 줄 압니다. 일주문에는

`OO山 OO寺'라고 산의 이름과 절의 명칭을 표기하고 있다.

 

 

 

최근에는 1997년 10월 높이 14.6m로 세계 최대의 청동불좌상이 조성한 지 10년 만에 일주문 앞에 봉안되었다.

이 청동대불은 통일을 염원하며 세운 것으로, 일명 ‘통일대불’로도 부른다.

 

 

통일대불

불 상 : 석가모니불
높 이 : 14.6m
좌대높이 : 4.3m
좌대직경 : 13m
소요청동 : 108톤
좌대조각 : 통일기원 16나한상
착봉일 : 1987.8.30 (음력 7.7)
점안 대법회 : 98. 10. 25

민족통일의 비원(悲願)을 안은 청동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곳 설악에 나투어 대자비로 비추사 분단의 아픔
을 끌어 안았다.속초 설악산 신흥사(주지 度吼)는 10년간의 통일청동대불좌상(統一靑銅大不坐像) 조성
불사(佛事)를 마치고 드디어 '97년 10월 25일 점안' 대법회를 봉행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을 형상화한 청동대불은 거불(巨佛)로서 좌대 높이 4.3m, 대불 높이 14.6m, 좌대 직경 13
m, 아파트 6층 높이에 1백8t의 청동이 사용되었다. 8면 좌대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십육 나한상(十六羅漢
像)이 섬세하게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화려한 것은 지름 10㎝의 인조 큐빅 1개와 8㎝짜리 8개로된 미간 백호는 중생계의 무명을 밝혀주듯 찬란
한 광채를 발광한다. 점안식*에서는 '92년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와 다라니경, 칠보
등 복장 유물도 봉안되었다.20세기 불상양식으로 기록될 신흥사 통일대불(新興寺統一大不)은 불상의 대가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정영호(교원대 박물관장), 고(故) 홍정식(전 동국대 교수), 김정기(한림대 교수)
가 자문하였다. 불모(佛母) 김성호(불교미술관장)와 자문위원들은 수시로 만나 청동대불의 석고, 주물,
조립을 비롯한 모든 과정을 점검하며 제작에 헌신하였다.

 

 

 


 

저 큰 청동대불의 몸체 내에 법당이 있다는 안내판

 

 

 

청동대불의 뒷편

대불의 몸속 법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지하로 들어가는 몸속법당 출입구

 

 

청동대불 몸속법당 내부

법당에는 일체 중생을 보살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설다원 찻집

글씨가 꼭 눈이 내려서 글씨가 흘러가는 것처럼.....

 

 

몸속법당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 놓았다가

신흥사로 향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참 거대하다...

 

어쩌면

부처는 늘 큰 우주이며

사람은 그앞에서 항상 작울 수 밖에 없다는

나름의 뜻을 생각해봤다.

 

 

극락교와 같은 다리를 건너

신흥사당우를 천천히 둘러보기 위해 울산바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다.

 

 

멀리 생뚱맞게 홀로선 바위를 바라보며....

 

 

 

돌탑을 쌓고 있는 꼬마들....

 

 

다른 고찰에는 주로 노송이 반겨주는데

여긴 설악의 명물인 주목나무가 노승처럼 서있다.

 

 

 

사천왕문

신흥사의 천왕문은 1811년(순조 11)에 주운(周雲) 스님과 철수(喆修) 스님이 처음 세웠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천왕문은 1972년 성준 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칼을 든 동방 지국천과 용을 잡고 있는 남방증장천,

비파를 연주하는 서방 광목천, 탑을 받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이 있다.
북방 다문천왕의 얼굴색을 검게 묘사하는 등 피부색까지 세심하게 배려하였으나

칠이 벗겨지는 등 손상된 부분이 많아 보수가 필요하다.

이들 사천왕은 외호신(外護神)으로서 도량의 가장 바깥쪽 사방을 지킨다고 한다.

따라서 이 문부터는 부처의 도량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쪽은 증장천왕으로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여름을 관장하며 구반다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를 거느리고 남쪽하늘을 다스리고있다.

남쪽을 상징하는 적색을 띤다.

 

 

서쪽은 광목천왕으로 손에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면서

가을을 관장하고 용과혈육귀로 불리는 비사사 신을 거느리고 서쪽하늘을 다스린다.

얼굴색은 백색이다.

 

 

북쪽은: 왼쪽 다문천왕으로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겨울을 관장하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얼굴색은 흑색이다.

 

 

동쪽은 온른쪽 지국천왕으로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인간 감정중 기쁨의 세계를 관장하고서,

계절중에서는 봄을 관장한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의 향기만 맡는다는 음악의 신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신을 거느리며 동쪽하늘을 지배한다.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을 띤다.

 

 

보제루

극락보전과 마주 보고 있는 2층 누각 건물 보제루(普濟樓)는

앞면 7칸, 옆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축대 위에 세워졌다.


1861년 이계황(李啓潢)이 지은 보제루중수기(普濟樓重修記)에 의하면 1644년(인조 22)에 건립되었고,

1770년(영조 46), 그리고 1813년(순조 13)에도 벽파·창오 부총·성기 스님 등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사방이 모두 개방되어 있었으나 1971년 성준 스님이 중수하면서 분합문을 달았다.

 

안에는 신흥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현판 등이 있다.

이들 중에는 ‘해악루(海嶽樓)’, ‘외설악루(外雪嶽樓)’, ‘백설루(百雪樓)’ 등

 한 때 보제루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현판이 있어 보제루의 연혁에 도움을 준다.

그리로 아주 힘찬 필체로 쓴 '설악산신흥사(雪嶽山新興寺)'편액도 눈길을 끈다.

 

 

 


신흥사 벋당앞에서 바라보면 '보제루'

사천왕문쪽에서 바라보면 '외설악루'라고 편액이 씌여 있다.

 

 

 

극락보전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보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서 신흥사의 중심 법당이다.

특이한 건축구조와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그 역사성과 함께, 극락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문에 새겨진 꽃 문살, 불상 위의 닫집,

천장의 금빛 문양, 공포(栱包) 등 전각과 수반된 여러 장엄이 모두 정성으로 만들어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이 극락보전은 영서·연옥·예원 스님 등이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중창할 때,

곧 1647년(인조 25)에 짓기 시작하여 1649년에 완성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각중(覺重) 스님이 중수하였고, 1770년과 1821년(순조 21),

1921년에도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정에는 네모진 격자를 마련하고 그 속마다 금박으로 한 송이의 연꽃을 만들어 놓았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의 원형과 주위의 여섯 원 속에 글자를 한 자씩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일즉일체다측일(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卽多中一)’ 등인데,

의상 대사의 법성게 문구들과 주상전하 및 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방의 대들보·기둥벽에는 서기를 띤 구름·비천상·화불·용·연꽃·산수화 등의 그림이 가득히 채워져 있다.
특히 모든 공포의 앙서·쇠서에는 여덟 송이의 연꽃이 표현되어 있는데,

청색·홍색·백색·황색의 연꽃이 차례로 채색되어 있다.

 

 

극락보전앞의 석등과 괘불석주

 

 

석등

극락보전 앞에 조성되어 있는 이 석등은 어둠을 밝혀주는 공양구로 중생에게 무명을 일깨워 주는 진리의 상징이다.

안상(眼象)이 새겨진 팔각의 지대석 위에 복련(伏蓮)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는 화려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간주석(竿柱石)을 세우고 앙련(仰蓮)의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에는 사천왕과 화창(火窓)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위의 옥개석(屋蓋石)은 둥근 우동(隅棟)으로 처마 끝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괘불석주

극락보전 앞에 조성되어 있는 돌기둥 괘불(掛佛)을 거는 받침대이다.

괘불은 법회시 법당 앞마당에서 예불을 드릴때 사용하는 큰 규모의 불화를 말한다.

보통 괘불석주와 당간지주를 혼동하는데,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조성되며 괘불석주는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기둥 사이에는 둥글거나 네모난 구멍 2~3개가 마련되어 있어 괘불대를 지탱하는 것이다.

 

 

 

극락보전 아미타 삼존불좌상

한결같이 원만한 상호와 비례가 빼어난 몸매, 빈틈없는 세부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약간 돌출한 눈과 입가에 띤 부드러운 미소, 후덕하게만 느껴지는 두툼한 귓볼,

온화한 느낌을 더해 주는 이중의 턱, 자연스러움을 풍기는 얼굴 옆모습 등에서 빼어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내의 위에 통견의를 착용한 불의의 표현도 사실성을 잃지 않았으며,

어깨가 풍후하고 무릎 폭이 넓어 장중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극락보전 편액

 

 

 

 

극락보전의 꽃살문

세월이 느껴진다

크레용으로 덫칠한듯한 질감

동화속 그림처럼 이쁘다.

 

 

 

 

명부전의 꽃살문

신흥사의 꽃살문은 동화같다

섬세하거나 화려하거나

잘그린것 같지는 않지만

정이가는 문살.....이쁘다.

 

 

 

안에 모신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재작년​ 보물 1749호로 지정됐다.

복장 축원문이 1651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제작자를 명기하고 있어

17세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당대 최고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

지장보살의 안정된 가부좌, 당당한 어깨, 알맞은 허리의 비례가 좋고

간결하고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양쪽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한다.​

 

 

명부전 내부

신흥사의 고승의 진영도 모셔져 있다. 

 

 

심검당

 

스님들께서 공부하시는 선방

 

 

 삼성각

극락보전과 명부전 사이의 높은 축대 위에 건립되어 있는 삼성각(三聖閣)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에 겹처마를 둔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신흥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진영각(眞影閣)이 1892년에 붕괴되자,

선악(仙岳) 스님이 그 목재를 모아 삼성각을 건립한 것이다.
안에는 1986년에 그린 칠성탱·산신탱·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은 하늘의 일월성진(日月星辰)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主帝神)으로 승격하게 된다.

신으로 숭배 되어온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그림으로 도상화한 것이 칠성탱(七星幀)이다.

 

불단 중앙에 있는 칠성탱은 정좌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해와 달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시립해 있다.

그리고 그림 상부의 좌우로 합장하고 있는 칠불(七佛)과 정수리가 높이 솟은 남극성(南極星),

하부 좌측에는 관모를 쓴 다섯 분의 성군, 하단 우측에 관모를 쓰지 않은 다섯 분의 노인이 시립해 있다.


이는 칠성탱의 여러 가지 구도 중 불교의 칠불과 도교의 칠원성군(七元星君),

토속의 칠성신(七星神)을 함께 그려 넣은 복합 탱화이다.

 그러나 칠원성군 두 분과 토속의 칠성 두 분이 생략되어 있다.

불단 오른쪽의 독성탱은 전통적인 독성탱의 정형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구도를 보이고 있다.


독성탱의 중심은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려 주는 나반존자이다.

독성(獨聖)은 범어로 pindolabharadvaja인데, 빈두로파라수(賓頭盧頗羅隨)로 음역되는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이다.

이 분은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로 잘 알려진 분이다.

화면의 중심에는 머리가 삼각형으로 솟아있는 나반존자가 크게 좌선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온화하게 그려져 있다.

 

불교의식집의 독성청(獨聖請) 유치(由致)를 보면,

나반존자는 천태산의 층층대 위에 홀로 조용히 머물면서 선을 즐기거나 낙락장송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또 흰 눈썹이 눈을 덮고 있으나 공(空)을 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통성탱은 천태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하여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신흥사 삼성각의 독성탱에는 나반존자가 반석 위가 아닌 화문석 위에 앉아 있으며,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달이는 동자와 시봉하는 동자 둘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독성탱에 많이 그려지는 파랑새 대신 학이 그려져 있고 앞쪽 개울물에는 서기(瑞氣)를 뿜어내는 거북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이 신선도 풍에 염주를 굴리며 한가로이 있는 고승도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인 삼성각의 배치 상, 홀로 있는 모습으로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말세·중세의 행복을 관하는 나반존자인 독성탱으로 봐야 한다.

 

불단 왼쪽에 봉안된 산신탱은 중앙에 불진(佛塵)을 들고 있는 도교적 산신이 의자에 앉아 있다.

왼쪽에는 두 개의 송곳니를 드러내고 걸어가는 자세를 취한 황색 호랑이가,

오른쪽에는 동자 한 명과 동녀 두 명이 지팡이와 과일 등을 들고 산신을 시봉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산의 신령(神靈)으로 존경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호랑이를 불교화하면서

산신(山神)으로 승격시켜 수용하게 그린 것을 산신탱이라고 한다.

엄하기보다는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고있는 백발의 산신은 부채를 들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옆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가 몸을 둥글게 말아 협시를 이루고 있다.

반대편에는 과일을 공양하는 동자와 표주박이 달린 산신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공자 등이 정겹게 그려져 있다.

 

 

 

근래 새로 지은듯한 조사전

문이 잠겨져 있어서 밖에서만...

 

신흥사 부도군

 

 

 

 

신훙사 풍경

 

 

 

 

신흥사와 설악산

다른 어느 사찰보다 지붕과 산의 어우림이 좋다.

 

 

 

 

 

범종각

현재의 범종각은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보제루 왼쪽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 건물인 이전의 범종각은

극락보전을 향해 오른쪽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이었다.

태극 무늬를 그려 놓은 문 위에는 세로로 세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로 나무를 얇게 깎은 장식이 있었다.

벽의 상부를 두르고 있는 홍살도 단아하지만,

 뒤쪽의 기둥 위로 장식된 앙서(仰舌)·쇠서(牛舌)·봉항·꽃 등을 일직선으로 놓고 보면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 한층 더 부각 되었다.

여러 장식이 들어있는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볼수 없게 되었다.

안에는 1748년(영조 24)에 원각거사(圓閣居師)가 처음 만들고 1788년(정조12)에 홍한(弘漢)스님이 고쳐 만든 대종이 있는데,

이 종은 사찰 경제가 어려웠던 조선시대 후기의 범종 중 대작에 속하는 것이라

 '한국종'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흥사 공양실

스님들의 정진중이라....낮은 문이 닫혀 있다.

 

 

 

정진중이라 출입을 금하고 있는 선원

 

 

 

 

 

절집에 오면 스님의 그림자만 보아도 반갑지요

 

 

 

 

 

 

설악산을 그리 자주 들면서도

경내를 찾아드는 것은 드문일이다

설악이라는 험한 행로를 넘다보니

몸이 지쳐 신흥다 경내를 들러볼 여유가 생긱지 않아서다

 

오랫만에 들렀더니

계절이 달라서인가

풍경과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담쟁이가 붉디 붉게 절집을 감싸고 있었던 그때는 마음이 따듯했다.

엄동설한에 찾아든 탓인지...

마음은 자꾸 바람과 같이 빙빙돈다.

 

초입 청동불상 몸속의 법당에서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하나보다

속세의 잡생각에 마음이 바늘이 꽂힌다

겨울바람보다 차갑고

유리처럼 조심스러운 사람들의 마음을 손에 들고

마음은 허공을 헤매인다

절집에 들면 조금은 비우고 가려나 했었는데.....

그게 그리 쉬우면 해탈을 했었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짐을 벗긴 힘든 것 같다.

 

 

 

 

 

일주문밖 세운지 얼마안되어보이는 석탑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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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설악산의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신흥사

들러보는데 필요한 시간은 많이 들지는 않다

 

잡념의 활동이 왕성할때

청동불상 몸속 법당에 앉아

고요를 깨달으며 마음을 비워보는 일...

 

이겨울 날을 세우는 계절임에도

때묻지 않은 지하의 세계에서 나를 찾아가보는 일도 좋은 수행이 될 것같다.

 

비슷비슷한 절집

그렇지만 색다른 통일대불이 있고

그 대불의 품속에서

흩어진 마음을 모아 마음의 통일을 얻으려 노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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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설악산 신흥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