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hotostory-山

2015.12.6. 경주 남산 (삼릉주차장-금오봉-포석정)

kyeong~ 2015. 12. 7. 15:37

 

경주 남산 금오봉 (468m)

 

1박2일 일정으로 떠난 여행

어제 부산을 걷고

오늘은 경주로 이동해서 산전체가 보물인 남산(금오산)을 걷기고 했다.

높지 않은 산, 둘레길을 수준의 길이고 심심치 않게 산 구석구석에서 보물이 들어있다고 해서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출발을 하였다.

 

2015.12.6.일요일

삼릉주차장~삼릉~선각육존불~상선암~금오산(정상)

-팔각정터(사자봉)-국사골 상사바위-금오정-늠비봉석탑-포석정-삼릉주차장

산행시간 4시간(사진촬영. 점심식사, 문화재 감상포함)

날씨:약간흐리고 포근함

 

 

 

 

경주남산慶州南山

 

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솟은 불적지(佛蹟地)가 많기로 유명한 산.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한다

 

 경주평야의 주변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이다.

높이 494m의 고위봉과 468m의 금오봉 두 봉우리와 산발들을 합쳐 경주 남산이라 한다.
까치봉이나 황금대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오산골 어구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으며

암석신앙의 유적물도 남아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도 이곳에 있다.

 

그 외에 왕릉들도 여러 군데에 있어 이 산을 신라 역사와 유적의 산이라 부른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마애불상도 많아 암석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경주 남산...

정상에 오르면 당연히 '남산'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늠름하게 서있으리라 짐작했는데

고위봉과 금오봉을 함쳐서 남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에

우리가 올랐던 봉우리는 금오봉

그래서 금오산 표지석을 만났던 것이다.

 

중간자...오(鰲) 고기어변이 들어가있는 한자를 만나니

문득 불교에서 절집 추녀밑에 물고기 풍경을 달아두던 그 생각이 났다

물고기처럼 밤에도 잠들지 않고 세상을 보고

푸른하늘을 바다처럼 유영하던 절집의 '물고기풍경'

그뜻에서 고기어(魚)변이 들어간 자라오(鰲)자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나름의 생각을 해보았다.

 

 

 

경주 삼릉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오솔길을 들어서자...삼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릉주차장(서남산주차장)

경주시 포석로 647

 

 

 

배리삼릉拜里三陵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3-1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세 개의 신라시대 고분.

 

사적 제219호. 남산(南山)의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다.

 

 

 

 

 

아달라이사금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왕릉소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달라이사금의 원손(遠孫)인 신덕왕은 『삼국사기』에서는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해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신덕왕의 태자로서 왕위를 이은 경명왕은 『삼국사기』에서는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황복사에서 화장해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왕릉주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사철 푸르른 탓일까..

 

삼을을 벗어나 산길로 재촉한다.

 

 

 

 

 

데크가 없어도 충분히 편안하고 걷기 좋은 길

주변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데크길을 낸것일까

 

 

 

남산 삼릉계곡 (삼릉곡 제1사지 탑재 및 불상전경)

 

천년고도 경주

신라가 숨쉬었던 곳에..

이렇게 곳곳이 파손된 신라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그자리에 다시 보존하고 있다.

 

 

 

 

 

 

마애관음보살상

 

 

 

 

보살은 원래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보살은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살타’의 합성어 ‘보리살타’의 줄임말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살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보살은 관음보살이다.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줄임말이다.

 세간의 소리를 듣을뿐더러 보기까지 할 수 있는 성인,

또한 지혜를 관조하고 자유자재하는 묘과를 얻는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라고 했다.

 고달픈 중생에게 온갖 자비를 베푸는 성인이라고 했다.

 
 탄생설화 속의 관음보살도 여성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의 모성적 자비심을 강조해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보살은 여래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불교경전의 대부분에도 여성의 형상으로 그 모습을 규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7세기 중엽 이후에 힌두교의 여성 숭배 신앙이 불교에 유입되면서 여성적인 모습을 한 관음이 경전 상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중국 송나라 이후 관음보살에 여성적 이미지가 도드라지졌다고 역사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여성으로 이미지화되었던 것 같다.

이는 신라시대의 불상에서 쉽게 확인된다.

 

보살은 신라시대의 불상 중에서 대부분 아름다운 여체로 조형되었다.

 경주 남산의 부처바위 남면 입상은 풍성한 둥근 얼굴에 어깨는 넓고, 가슴을 부풀어 오른 반면에 허리는 가늘다.

상대적으로 풍성한 엉덩이와 두 다리로 이어지는 양감은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마애관음보살상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1.5m.

 

이 마애석불의 정확한 조각연대와 조각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주형(石柱形)의 암벽 남면에 양각(陽刻)한 이 조각은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연화좌(蓮華座) 위에 직립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한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었으며, 얼굴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어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돼 있다.

뒷면에는 직립한 석주형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기도 하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듯하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경주 남산 서쪽 사면의 삼릉계곡에 있는 큰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내어 부조한 관음보살상이다.

전체 윤곽이

광배

(

光背

)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정병

(

淨甁

)을 든 모습이다. 얼굴과 몸의 윗부분은 비교적 고부조로 입체감이 있게 표현되었으나,

 허리 아래 부분은 윤곽이 불분명하고 표면이 거칠며, 왼쪽 다리 옆의 정병만 고부조로 표현되어 확실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하체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가 허리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 늘어져 있고,

양 다리에 각각 U자형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선각(線刻)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천의가 입혀진 형식이나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정병을 들고 있는 손모습은

통일신라 8세기 관음보살상의 전형적인 표현인 경주의 굴불사지사면석불(掘佛寺址四面石佛) 중 서쪽면의 왼쪽 관음보살상이나

칠불암마애삼존불(七佛庵磨崖三尊佛) 중의 정병을 든 보살상 등과 유사하며,

불상의 비례와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지물

(

持物

) 등 에서 8세기 후반경의 제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산 삼릉계곡(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경주 서남산 삼릉계

                             

서남산의 삼릉계곡은 삼릉에서 금오봉까지 11개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있었다고 전한다.

남산 유적지 가운데 가장 많은 유적이 있고, 일반 산행인들이 편하게 가장 많이 찾는 코스 이기도 하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1.6m 무릎넓이 1.56m 규모의 석불좌상으로

 1964년 동국대 답사팀에 의해 현재 위치에서 남쪽으로 30m떨어진 땅 속에서 발견 되었다.

 

머리 부분은 결실되었고 양쪽 무릎도 파손 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비교적 형태가 뚜렷하다.

특히 가사의 주름과 왼쪽 어깨와 가슴 중앙의 매듭, 무릎 위로 흘러내린 매듭 끈 등이 정교하여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

.

멸실되고 파손된...수많은 유산들을 찾아서 모양을 찾고

다시 역사를 찾아내고..

역사에 대해 집념을 가진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머리부분이 없어 만약 밤에 이 불상을 만난다면 얼마나 놀랄까 싶기도 하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 남산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의 마애불상군이다.

불입상이 본존인 삼존상과 불좌상이 본존인 삼존상이 각각 다른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명칭은 따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이 상들의 표현은 보살상의 착의법이나

목걸이 장식, 여래상의 소발(素髮 : 민머리)의 표현과 풍만한 신체 표현이

 통일신라 초기의 경주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과 가깝게 보이며,

우견 편단의 착의법만 다르다.

따라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좌측의 조금 돌출된 바위 면에 새겨진 불입상의 삼존불은

 좌우의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 쟁반을 받쳐 들어 꽃 공양을 하는 모습을 대담한 곡선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삼존 모두 둥근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이 있으며,

본존 불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신체도 풍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상들이 머리와 몸체에 알맞은 비례감을 보여 준다.

 

편단 우견(偏袒右肩 :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의 착의법에

왼쪽 어깨를 넘어가는 대의(大衣 :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의 옷단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다.

허리 밑에서 발 윗부분까지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올렸고 왼손은 배 앞으로 들어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보살상은 가슴 앞에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천의(天衣 : 천인이나 선녀의 옷) 자락이

몸 옆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하체는 연결이 불분명한 부분도 있으나 밀착된 군의(裙衣)를 통하여 드러나는 신체를 표현한 듯,

다리의 윤곽이 간간이 새겨져 있다.

삼존상 모두 특징적인 부분을 포착하여 간략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오른쪽 뒤의 큰 바위 면에 선각된 불좌상 본존의 삼존상도 착의법이나 표현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묘사력에서는 뒤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좌상보다 입상의 보살상들이 조금 작게 구성되었고,

삼존 모두 둥근 두광을 새겼으며 본존상에만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표시했다.

좌협시는 바위 면의 균열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본존상은 우견 편단의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에 오른손을 앞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바닥을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상체에 비해 무릎 폭이 좁고 하체의 표현은 치졸한 편이다.

보살상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왼손은 손끝을 밑으로 하여 배 앞에 대고 있다.

 

 

 

삼릉계 선각여래좌상

 

선각육존불 위로 바위를 타고 500m 숲속을 오르면 절벽에 마주한다.

높이와 너비 모두 10m 쯤 되는 절벽의 중앙에 자연적으로 수평으로 금이간 바위에

아래 쪽을 대좌로 삼고 윗 쪽에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그림의 높이는 1.2m 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한다.

 

 

 

 

 

 

몸체는 선각을 하고 얼굴만은 돋음 새김을 하고있다. 

얼굴은 크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입술은 두껍고 커서 과히 점잖은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위엄이 있다.

조각 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특히 다리 부분에는 거의 손을 대지않은 듯 미완성 작품으로 여겨진다.

 

 

 

 

 

한쪽면 작은 동굴이 있고

여기서 촛불을 피우고 기도를 하던 곳 같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666호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자리잡고 있다. 얼굴은 원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옷주름선은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은 각 면에 간략하게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대석으로 되어 있다.

8각의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을 비롯하여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 등으로

보아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석탑은 없고 제6사지 석탑터만 남아 있다.

그냥 그렇게 있었으려니....

짐작하며 다음 발길을 옮긴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제6사지 석탑터

 

 

 

상선암(上禪庵)

석조여래좌상에서 삼릉계 본류를 따라 300여 m 가파른 고개길과 돌층계를 올라가면

            병풍을 둘러친 바위산 아래의 암자가 보인다.

상선암(上禪庵)이라 부르는 불국사의 말사다.

            터는 신라 때 터이나 암자는 근래에 지은 것이다.

 

 

 

동(東)으로는 상사바위(想思岩),

북(北)으로 해발 400m의 냉곡 암봉(冷谷岩峰)에 둘러싸인 두 채의 작은 암자다

이 곳의 남쪽 아래에 신라의 스님들이 선(禪)을 하던 동굴이 있는데,

이 선방이 높은 곳에 있다하여 상선암(上禪庵)이라 불러왔다 한다.

극심한 가뭄탓에 3월 하순에 들린 암자는 "물"을 시주받고 있었다.

 

 

 

상선암을 뒤로 하고 다시 금오봉을 향하여 올라간다

 

 

 

 

 

 

 

상사바위

마애불을 지나 경주 남산의 주능선에 올라서면 포석골의 정상과 삼릉골의 정상이 만나는 지점에 높이 약 13 m, 폭 25 m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이름하여 "상사바위"다.

 

"동경잡기"에 적힌 글에 따르면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낫는다고 하며, 자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한다. 이 바위의 동면 아랫쪽에는 가로1.44 m, 높이56 cm, 깊이30 cm 정도인 직사각형 감실이 패여 있고, 그 아래 머리 없는 80 cm의 작은 불상이 서 있다. 

 

이 바위를 서쪽(삼릉쪽)에서 보면

삼릉골의 여울에 뿌리를 내린 수십미터 높이를 솟아오른 거대한 첨탑처럼 위용있게 보이고, 

동쪽(통일전 방향)에서 보면

산등성이에 직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있어 염라대왕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험상궂은 상이라 한다.

 

 

 

상선암에서 냉곡 암봉을 향해 산등을 타고 굽이굽이 100m 쯤 오르면

산등을 넘는 고개마루 조금 못 미쳐 쪽으로(삼릉방향) 열린 터가 있다.

발길을 왼쪽으로 돌리면 시야에 비치는 정경은 이미 속세가 아니다.

갖가지 모양을 바꾸며 뻗어내린 큰 바위들은 발 아래로 사라져가고

배리(拜里)평야는 아득한 아래 세계로 아물아물 멀어진다.

 

 

 

 

경주 남산에는 큰 법당을 가진 절이 없다.

산과 바위가 모두 부처님이 계신 법당이 되기 때문이다.

남산의 마애불들은 이렇게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겸손하게 인공을 양보하고 있는 것이다.

 

 

 

 

마애대좌불

이렇게 신령스러운 곳에 동서의 길이가 6m 가량 되고 남북 너비가 4.3m 되는 평평한 터가  있는데

          그 북면에 높이가 7m이고 너비가 5m되는 배광(背光)형으로 생긴 암벽이 천연으로 이루어졌으니,

             이 곳은 하늘이 정해준 부처님의 영지(靈地)인 듯 하다.

 

 

 

신앙의 정열에 불타던 신라의 조상들이 이러한 곳을 어찌 그냥 버려 둘 수 있었으랴.....

            배광형 암면(岩面)에 큰 불상을 새겨 놓았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온 누리를 굽어 살피는 모습이다.

                   대좌의 연꽃은 두 겹으로 피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로 장식되어 지극히 화려하다.

            이 불상은 새겨진 바위 전체가 약간 뒤로 기울여져 있기 때문에 부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온 누리를 제도하시는 듯 폭넓은 기상을 보이고 있다.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면 시야에 비치는 정경은 이미 속세가 아니다.

갖가지 모양을 바꾸며 뻗어내린 큰 바위들은 발 아래로 사라져가고

배리(拜里)평야는 아득한 아래 세계로 아물아물 멀어진다.

 

 

 

으로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을 이룬 상사바위가 하늘에 떠있는 듯 장엄하게 솟아있고 주산이 되는 북쪽은

냉곡 암봉이 준엄하게 솟았는데 남쪽은 천길 절벽으로 바닥을 볼 수 없다.

눈 앞에는 다만 금오산(金鰲山) 정상이 우뚝 솟아 보일 뿐이다.

 

 

 

금오산 정상

삼릉골(냉골)의 시발점은 금오산 정상이다. 따라서 삼릉계 답사의 끝도 금오산 정상이다.

             금오산은 해발 468m로 해발 494m인 고위산(高位山)과 합쳐 "남산(南山)"이라 부르고 있다.

 

 

 

 

저기 어디뜸에 보물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경주땅

온시야가 박물관 같은 경주땅

 

멀리바보는 순간 산천의 귀함

역사의 귀함이 전해져 온다.

 

 

 

 

 

포석정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거대한 암석이 떨어질듯 경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랜세월을 버티고 서있다.

인공으로 받침석을 세운것같이...

 

 

 

 

금오정

 

 

 

포석곡 제7사지 큰늠비절터

 

 

 

 

금오정에서 늠비봉을 타고 내려오다보면 푸른하늘을 뚫고우뚝 서있는, 

신령스런느낌의 탑신 1기를 볼수있다.

늠비봉에서 바라보는 탑과 그 전망을 남산의 8경으로 친다는 말이 있듯이
과연 여러개의 자연바위 위에 서서 서라벌 도심을 내려다보며 자리잡은
당당한 5층석탑의 모습은 주변의 푸른하늘과 어울려 너무나 아름답다.

전문가들은 이 석탑의 양식이 백제식이라고 말한다
경주의 탑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탑은 멸망한 백제의 석공들이 여기에서 탑을 세웠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주지역에 5층석탑은 통일신라때 작품인 나원리 5층석탑과
이곳 늠비봉 5층석탑밖에 없는 귀한 탑이라고 한다

포석곡에 자리 잡은 늠비봉 5층석탑은 2002년에 주변에 흩어지고 멸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석탑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석재가 소실되어서 옛 석재와 새로
 갖다붙인 석재로 재 복원했다하여 문화재로 지정받지도
못하고있다 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그래서 안내판 조차 없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안내판 정도는 세워주는것이  넘어지고 깨어지며
천년을 견뎌온 이 아름다운 탑에 대한 후손의 예가 아닐까 - - - 

아직도 탑의 주변에는 께어진 그때의 석재들이  제짝을 찾지못하고
즐비하게 쌓인것을 바라보며 아픈가슴을 달래본다 

이탑은 화강암의 거대한 뿌리가 탑을 지탱해 주도록 했다.
 자연바위를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는데
그렝이 공법(인공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아 맞물려 놓는 공법)을 통해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지는 석탑을 만들었다
불국사의 석단도 이 "그랭이공법" 으로되어 천년을 지탱해 왔다.
다시 한번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혀를 두르며 이것만 해도 안내판 하나정도는 세워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안내판도 없는 늠비봉 5층석탑

늠비봉에서 바라보는 탑과 그 전망을 남산의 8경이라고 한다.


 여러개의 자연바위 위에 서서 서라벌 도심을 내려다보며 자리잡은 당당한 5층석탑의 모습은 

주변의 산줄기보다 더 기운이 넘쳐흐른다.

 


 

 

 

이 석탑의 양식이 백제식이라고 말한다
경주의 탑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탑은 멸망한 백제의 석공들이 여기에서 탑을 세웠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주지역에 5층석탑은 통일신라때 작품인 나원리 5층석탑과
이곳 늠비봉 5층석탑밖에 없는 귀한 탑이라고 한다

 

아직도 탑의 주변에는 께어진 그때의 석재들이  제짝을 찾지못하고
즐비하게 정리해두었다

어서 짝을 찾아 중요한 보물로 우리곁에 서있길 바래본다.

 

 

 

 

 

 

포석곡에 자리 잡은 늠비봉 5층석탑은 2002년에 주변에 흩어지고 멸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석탑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석재가 소실되어서 

옛 석재와 새로 갖다붙인 석재로 재 복원했다하여 문화재로 지정받지도 못하고있다 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그래서 안내판 조차 없다.

 

 

 

 

 

 

이탑은 화강암의 거대한 뿌리가 탑을 지탱해 주도록 했다.
 자연바위를 그대로 기단으로 삼았는데
그렝이 공법(인공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아 맞물려 놓는 공법)을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어우러지는 석탑을 만들었다
불국사의 석단도 이 "그랭이공법" 으로되어 천년을 지탱해 왔다.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며 안내판이 설치되어 길손들이 우리문화유산의 중요함을 되새겨볼수 있길 기원해본다.

 

 

 

 

탑 뒤로 돌아가 경주 배리평야를 바라보며..

 

 

 

 

 

아마도 기우제를 지냈던 제단인것 같다.

 

 

 

 

솔잎이 섬세하게 바닥위에 덮혀있고

그 위룰 걸어가는 동안

왠지 우리의보물을 얻고오는듯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보물을 살피느라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하산점에 이르니 포석정이다

이번 산행코스는 끝까지 볼거리를 제공한다.

입장료1000원

학창시절 경주수학여행에서 만나고...실로 오랫만에 포석정을 만난다

 

 

 

 

포석정 鮑石亭

포석정(통일신라), 사적 제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경주 서쪽 이궁원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에 흐르게 하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유상곡수라는 시회로 중국 동진시대부터 유행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했던 궁정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포어 모양의 수구뿐인데 일제시대에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술잔을 띄웠다던 수구에 물이 말라있다

옛조상들의 여유와 정취를 느끼게 하는 포석정

지금사람들의 술잔을 따르기가 무섭게 원샷을 하는 모습과 비교가 된다.

 

 

 

 

 

 

 

주차를 한 삼릉주차장으로 가는 길

마을의 모습이다

12월이라하지만 밭에는 푸른채소가 너무나 싱싱해서 봄인가 싶을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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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내용을 담고

조상의 손재주와 기운을 느끼며 걷는동안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남산(사적 311)전체가 유물 유적의 보고인데

오늘 본 부분이 극히 일부인점을 보면

몇번을 더와야 왠만큼 경주의유적을 알 수 있을까

주로 길위에 주차를 하고 들여다 보던 유적지와 달리

산을 오르며 곳곳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역사와 손길을 살펴보는 일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산에 오르면 무릎이 시원치 않아 한번쯤 생각하고 오르게 된다.

그리높지 않아서 좋고

유적지가 많아 쉴 틈이 많아서 좋고

경관이 좋아서 기분이 좋고

남산의 유적들을 살펴보며 오르는 산행...

얼마나 재밌고 시간가는 줄 모를까

어디나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는 미련과 기대를 가지지만

경주남산은 더욱 더 큰 미련을 두고 집으로 향했다.

 

2015.12.6.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