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쪽 비워둔다면

poem-아직도 모르지만 441

꿈이라도 좋아(백화산 진달래밭에서)

꿈이라도 좋아 /梁 該 憬 핸드폰을 본다 수많은 문자사이에 통화한 이는 하루에 한두 명 짧은 문자 몇 마디에 감정은 무얼 할까 버선발로 휘젓는 벚꽃 잎을 따라나섰더니 꿈이라 해도 좋아 날라리 봄날에 감정은 습관처럼 따라 웃는다 진달래 피는 곳마다 고향 같단다 붉은 입술 히죽이 벌리고 꽃술 빼문 진달래가 유유상종이라 나를 닮았어 문자 말고 혀룰 빼물고 웃고 싶었지 진달래 피는 봄은 모두가 고향이더라 진달래 혀 빼물고 피는 날이 생일 같은 봄이었더라 진달래 숲에 앉았다 떠나는 바람처럼 덩달아 꽃이 되지 못해 나는 봄처럼 떠날래 저너머 청보리밭 골짜기를 걷다가 꿈이라도 좋아 다음봄을 기다릴래 2023.04.02, 태안 백화산 진달래 밭에서

지리산을 오르며(천왕봉)

지리산을 오르며 / 梁該憬 물 두병 떡 한 봉지 배낭에 넣고 캄캄한 지리산을 오른다 발 끝에 걸리는 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달리 아는 길이 없어 남들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오른다 이 길이 천왕봉으로 간다 하여 핏기 잃은 낙엽이 밟히는 것도 모르고 산을 오른다 집채만 한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 랜턴 하나 달랑 들고 누군가와 같이 가는 사람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타인 외로움보다 덩치 큰 어둠 속에서 쪽달을 보며 엄마 쪽머리가 그립고 별 몇 개에 마음 전부를 걸던 시간 중턱쯤에 이르러서야 어둠이 껍질을 벗고 있다 걸어온 길이 돌밭이었구나 갈 곳도 아득히 먼 저기 너무 많은 것이 보이는 세상은 등짐보다 더 무거운데 운무만이 하얗게 다가선다 2022.11.20. 지리산 무박산행

그래도 다행인건 (구룡령~응복산)

그래도 다행인 건 높은 고지 길은 어두웠다 허공을 찾지 못한 길은 세상에서 가장 긴 뱀처럼 누워있다 어디서나 빛나던 햇살은 그물처럼 촘촘한 숲을 뚫지 못했다 유월의 잠을 가르지 못한 들꽃은 보이지 않고 지독하게 살아가는 잡풀만 무성하다 기대했던 들꽃과 새소리가 없는 길은 빈 뜰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최신형 네비도 가끔 오작동을 하는데 단 하나의 길만 따라가면 된다 그늘 깊은 외길을 가는 동안 햇빛은 심지처럼 끌어올린 나무 끝에서 빛나고 있는지 세상 모두 다 끌어안고 살다가 함박꽃에게 빚진 키스를 퍼붓고 있는지 오지의 심장을 거쳐 나온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묵비권 행사하는 것처럼 걸었다 그늘이 깊은 길 살아왔던 젊은 날과 같다 이 생각 저 생각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데 새의 부리로 툭툭 치며 이제 그만 내려..

2022.4.17. 그해 봄

그해 봄 잡목들 사이로 교실 복도처럼 나있는 길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인기척에 복도로 들어서려는 진달래 뒤죽박죽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아무도 모르는 숨소리를 얹어본다 진달래 꽃술이 붉게 타는 소리 뉴스 첫머리에 날마다 오르는 숫자가 있기 그전 숲의 통로로 들어가고 있다 독하게 버틴 기침을 봄물에 잠시 쏟아낸다 바위 끝 절름발이로 선 진달래도 나무 뒤에서 열병을 앓던 진달래도 햇빛으로 빛나는 하늘에 핀 진달래도 나를 위해 피었던 것은 아닌지 품으로 자꾸만 들어서는 진달래 뒤죽박죽으로 핀 진달래를 안고 통계의 숫자가 질 생각을 않는 독한 계절로 다시 돌아왔다 무심코 안고 온 진달래 하필 독한 계절에 내게로 왔는지 梁該憬 2022.4.17.일 남원 문덕봉에서

2021.9.25. 만복대에서

만복대에서 만복대로 가는 길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등대 같은 달빛을 따라 그만그만한 봉우리를 항해하듯 넘어간다 아침햇빛이 만복대를 일으켜세우는 시간 파도처럼 밀려왔던 바람은 반야봉에 걸터앉아 안개를 부풀리고 있다 섬과 섬같은 만복대와 반야봉 경계가 사라져 간다 안개가 골짜기를 지우고 있는 시간 반야봉이 아침햇빛에 이슬을 털고 있는 동안 억새의 은빛털이 바람 속으로 가는 동안 만복대에 걸터 앉으니 마음은 원하는 바 없다 지난밤 바람따라 누웠던 풀잎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맑은 피가 흐른다 오늘이 다 가도록 바람이 안개를 다 지우도록 슬픈빛깔 고요함이 깊은 골짜기를 메우도록 반야봉이 먼 섬같이 머뭇거리는 사이 그러고 보니 나는 바람이었네 만복대를 지나는 이름없는 바람이 었..

2021.5.30. 선작지왓을 습작하다

선작지왓을 습작하다 남보다 서둘렀지만 뒤따라 오던 사람들이 앞질러간다 가파른 계단 위로 쏟아지는 호흡은 앞질러가는 발걸음을 놓아버린다 골짜기에 접혀 숨어 있는 길을 따라 온 힘으로 오르다 보니 뒤쳐져 있는 감정선은 기복을 오르내린다 선작지왓으로 가는 길 오래된 문장을 꺼내 들고 아홉 번째 습작을 하고 있다 가장 빨리 오른 적은 없지만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던 기억을 적고 있다 오늘은 습작 노트에 무릎 아래에서 자라던 조릿대가 산머리까지 올라갔다고 쓴다 천년을 산다는 주목은 왕이 아니었다 꽃분홍 철쭉은 왕의 그녀가 아니었다 선작지왓 조릿대 평전에서 산머리를 지나는 하늘은 먼저 온 사람들을 어루만진다 조릿대의 천하, 철쭉꽃의 생은 오월의 변두리에서 지고 있다. 梁該憬 2021.5.30. 일. 한라산 윗세..